읽기/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나치의 시작과 끝, 뉘른베르크

mayiread 2023. 6. 7. 21:3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만한 여러 가지 배경지식들을 정리해보고 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아렌트가 수차례 각기 다른 의미로 언급하는 장소, 뉘른베르크(Nürnberg, Nuremberg)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뉘른베르크에선 무슨 일이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100회 넘게 뉘른베르크라는 지명을 언급하는데, 문제는 이렇다 할 배경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엔 그저 중세풍의 고즈넉한 관광지에 불과한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턱이 없는 독자로서는 다소 당황스럽달까.

 

중세풍의 독일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는 오늘날의 뉘른베르크 (출처: 뉘른베르크 관광청)

 

때문에 아렌트가 뉘른베르크에서 무슨 법이 있었다든가, 누가 처형을 당했다든가, 누가 누구를 변호를 했다든가 하는 세부 사항들을 늘어놓을 때마다 독자들은 쉽게 흐름을 잃고 헷갈리기 십상이다. 예를 몇 개 들면 이렇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38p & 94p

예루살렘 법정에서는 뉘른베르크에서 확정된 '범죄 조직'의 정의를 따랐다. ... 그런데 뉘른베르크의 구분은 부적절했고 제2제국의 현실에 잘 맞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빼앗았지만 시민적 권리를 빼앗진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국민(Reichsbürger)이 아니지만, 독일 국가의 일원(Staatsangehörige)으로 남아 있었다.

 

맥락을 열심히 추론해보자면, 뉘른베르크에서 뭔가 사람들이 모여 '범죄 조직'의 정의에 대한 논의를 했던 것 같고, 거기서 꽤 반유대주의적인 법도 만들어졌던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앞뒤가 맞질 않는다. 뉘른베르크는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법을 만든 곳인데, 예루살렘 법정이 그곳에서 논의된 정의를 따르고 있는 것이니까.

 

도대체 뭘까? 이스라엘의 높으신 분들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뉘른베르크 법을 만든 걸까? 아니면 예루살렘 법정이 반유대주의 논리를 인용할 정도로 공정했던 걸까? 아니면 뭔가 내가 모르는 다른 맥락이 있는 건가?

 

이런 여러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면 잠시 잊자. 비교적 짧은 이 포스트만 읽고 나면, 아렌트가 어떤 목적으로 이 장소를 언급하는 건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니까. 뉘른베르크와 관련해 알아야 할 건 사실 딱 두 가지다: 뉘른베르크 법,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뉘른베르크 법과 '랍비의 법'

뉘른베르크라는 도시는 나치의 흥망성쇠를 함께 했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아이러니한 장소이다. 나치가 전성기의 맹위를 떨쳤던 곳도 뉘른베르크였고, 패전 후 나치 잔당들이 전범 재판을 받고 처형당한 곳도 뉘른베르크였다. 나치의 시작과 끝을 모두 목도한 도시랄까.

 

나치의 전성기를 한 눈에 보기 좋은 행사로 나치 전당대회 만한 것이 없다. 나치는 엄연한 정당이었고, 정당의 힘은 지지자의 규모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나치는 이에 매년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뉘른베르크로 전국의 당원들을 불러 모아 전당대회를 열었는데, 이 전당대회에는 50만명에서 최대 100만명까지도 모였다고 한다.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 (출처: Deutsche Welle)

 

대부분의 정치권력이 그렇듯, 나치도 강력한 힘을 손에 얻게 되자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 힘을 과시했다. 강력한 반유대주의 법률을 통과시키고 이를 1935년 전당대회에서 발표한 것이다. 뉘른베르크의 전당대회에서 발표되었기에, 이 법률을 뉘른베르크 법이라고 부른다.

 

뉘른베르크 법은 두 가지 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독일 혈통 및 명예보존법제국 시민법이었는데, 두 법률을 함께 적용하면 유대인에게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할 수 있었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유대인 대학살의 근거 '뉘른베르크법' 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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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나치 정부의 관보(gazette)에 실린 제국 시민법과 독일 혈통 및 명예보존법 (출처: 위키피디아)

 

먼저 독일 혈통 및 명예보존법의 1조 1항에서 독일 혈통의 시민과 유대인 사이의 혼인을 금지한다. 그리고 제국 시민법의 2조 1항에서 독일 혈통의 시민만을 국민으로 인정한다. 나치는 당시 (존재하지도 않는) 순수 독일 혈통을 '아리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니, 쉽게 말해 '아리아인의 피가 흐르지 않는 모든 시민들'에게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아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혼인을 금지했으니, 유대인으로서는 앞으로 '아리아인의 피'를 가계에 흐르게 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이 법률이 통과되고 공표된 시점부터 유대인들은 국민으로 인정받을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법률 공표 전에 성사된 결혼에서 얻은 '혼혈인'은 어떻게 대우했을까? 나치의 꼼꼼함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뉘른베르크 법 공표 이후 얼마되지 않아, 출생 배경에 따라 혼혈인들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구체적인 방침이 정해졌다.

 

출생 배경에 따른 혼혈인 등급을 구분한 차트들 (출처: 미국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 & 위키피디아)

 

이 방침에 따라 국민들은 크게 독일 혈통(Deutschblütiger), 1급/2급 혼혈(Mischling ersten/zweiten Grades), 유대인(Jude)으로 구분되었으며, 혼혈 등급의 시민들은 유대교 신앙을 포기하거나, 불임 수술을 받아야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참정권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이기를 포기하거나, 자녀를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뉘른베르크 법을 언급할 때 지칭하는 것이 바로 이 법률이다. 아렌트는 이 법률이 지닌 다양한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 언급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그녀가 유대인들의 교리인 '랍비의 법'을 뉘른베르크 법과 유사하다고 비꼬는 대목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4p

랍비의 법으로 유대인 시민권에 대한 개인 자격을 규정하는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유대인도 비유대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 ... 다른 민족과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법적으로는 사생아이며,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유대인과 결혼할 수도 없고 유대인식으로 장례를 치를 수도 없다.

 

아렌트의 설명을 읽어보면 두 법에 사실상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이나 나치나 인종차별주의적이긴 매한가지라는 아렌트의 지적은 실로 매우 날카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렌트도 나치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다른 이스라엘 민족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니까.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뉘른베르크 항변'

나치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으니까. 승전국들은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는데, 바로 나치가 맹위를 떨쳤던 바로 그 도시, 뉘른베르크에서 전범재판을 연 것이다. 재판의 공식 명칭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었지만, 사실상 전범을 처형하는 것이 목적인 전범 재판이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열렸던 '뉘른베르크 정의궁'의 600호 법정 (출처: 위키피디아)

 

이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건 11명이었고, 그중 10명이 실제로 처형되었다. 처형되지 않은 1명은 헤르만 괴링이라는 나치 최고위 인사였는데, 사형 집행 전 시안화칼륨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기 때문에 처형을 할 수 없었다.

 

사형을 선고 받은 후 자살한 헤르만 괴링 (출처: 위키피디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뉘른베르크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한다면, 그건 모두 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있었던 일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렌트는 재판의 세부 사항을 여러 차례 인용하며 이 재판을 언급하지만, 사실 아렌트가 가장 염두에 두며 비판한 것이 바로 '뉘른베르크 항변(Nuremberg Defense)'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뉘른베르크 항변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몇몇 피고들이 사용했던 논리로, 그 내용은 간단하다. 자신은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그 명령이 없었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므로,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피고인들 (출처: 위키피디아)

 

아돌프 아이히만도 이 논리에 기대어 자신을 변호하는데, 당연히도 예루살렘 법정은 이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는 '사유의 무능'이 악의 근원이라는 아렌트의 주장에 영감을 줬을 뿐이다.

 

하지만 아렌트의 이러한 주장에는 사실 어떠한 새로움도, 깊은 통찰도 없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에 대한 보고서는 결국 나치의 뉘른베르크 항변에 '사유하지 않은 죄'라는 유죄 판결을 선고하는 그녀의 400쪽짜리 판결문일 뿐이다.  

 

 

[마음을 울리는 한 줄] 사유하지 않은 죄

 

www.hankookilbo.com

 

아렌트는 유대교의 법이 나치의 법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음을 지적할 줄은 알았지만, 아이히만의 '무능함'을 경멸하고 그가 교수형을 당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자신의 복수심 넘치는 글이 얼마나 나치의 선전과 닮아 있는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는 독자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어쩌면, 아렌트와 유대 민족이 나치로부터 배운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찾아내는 것일지 모른다.  

 

<Eichmann in Jerusalem> 에필로그 마지막 문장. 번역은 필자.

... just as you supported and carried out a policy of not wanting to share the earth with the Jewish people and the people of a number of other nations - as though you and your superiors had any right to determine who should and who should not inhabit the world - we find that no one, that is, no member of the human race, can be expected to want to share the earth with you. This is the reason, and the only reason, you must hang.

이 세계에 누가 거주해야 하고 누가 거주해서는 안되는지를 결정할 권리가 마치 당신과 당신의 상급자들에게 있는 양, 당신이 유대 민족 및 수많은 타국가 민족들과 지구를 공유하지 않으려 하는 정책을 지지하고 시행했듯이, 우리는 아무도, 즉 인류의 구성원 중 그 누구도 당신과 지구를 공유하길 원하리라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만 할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 -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

앞으로 여러 개의 포스트를 연재하며 한나 아렌트의 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첫 포스트의 목적은 하나다. 당신이 을 읽지 않게 하는 것.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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