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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 -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

mayiread 2023. 5. 5. 16:13

 

 

 

앞으로 여러 개의 포스트를 연재하며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포스트의 목적은 하나다. 당신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지 않게 하는 것.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내 독자들이 한나 아렌트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역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덕이겠다. 여기에 붙어다니는 키워드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다. 당연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부제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니까.

 

독점 판권을 쥐고 있는 한길사도 표지에 "평범한 당신도 악이 될 수 있다"라는 문구까지 써가며 '악의 평범성'에 대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독자들은 정치이론가로 알려진 한나 아렌트의 '악'에 대한 깊이 있고 독창적인 사유를 발견하길 기대하며 책을 산다.

 

한길사가 독점 번역해 출간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최근 리커버판을 냈다. (출처: YES 24)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겠다. 단언컨대 당신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기대했던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악'에 대한 아렌트만의 깊이 있는 통찰과 논리정연한 사유를 기대하며 (특히 한길사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어들었다면 당장 내려놓아야 한다.

 

 

 

전범 재판 참관자의 '시사 논평'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내려놓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 그 부제에 있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라는 부제는 당신을 속이는 첫 번째 낚시이다. 부제만 보면 이 책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논리정연하게 전개하는 정치·윤리 철학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나치 전범의 재판에 The New Yorker 기자 자격으로 참관한 뒤 연재한 기사를 모은 것이다. 이 재판과 관련된 여러가지 흥미로운 배경들은 이후 자세히 설명하겠다. 지금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신문의 '시사 칼럼' 모음 정도라고만 편하게 생각해두자.

 

The New Yorker의 A Reporter at Large에 연재된 아렌트의 기사 (출처: The New Yorker 디지털 아카이브)

 

 

대부분의 시사 논평들처럼 아렌트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대부분의 지면을 당시의 시시콜콜한 시사적·정치적 상황을 논평하는 데 할애한다. 아이히만을 기소한 검사의 말투가 어쨌느니, 재판의 진행이 저쨌느니 하는 식이다.

 

아이히만을 기소한 검사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법무부 장관이었던 기드온 하우스너는 아렌트의 주요 비난 대상 중 하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3p

검사는 ... 법정에서 자주 방청객을 힐끔거리거나, 일상적 허세보다도 더 심한 연극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백악관의 인정을 받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업무를 잘 수행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정의는 이런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검사에게 배트맨의 미학을 요구하는) 재판 논평이 끝나면, 나치 치하 독일과 주변국들에서 벌어졌던 여러 군사 행동들과 난민 이송 사업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지정학적 세부 사항들이 빽빽하게 밀려들어온다. 이쯤되면 내가 전쟁사를 읽고 있는 것인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결국 얼마 남지 않은 한정된 지면 안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논의는 깊이를 상실하고 인상적·주관적인 논평에 그치고 만다.

 

 

 

마지막 문장 속 '악의 평범성'

방금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논의가 깊이를 상실한, 인상적이고 주관적인 논평이라고 혹평했다. 아렌트와 같이 영향력 있는 정치철학자를 한낱 블로거가 이렇게 깎아내리다니, 정말 건방진 언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 언사에 불쾌함을 느끼기 전에 이거 하나만 알아주시길. 아렌트는 수백쪽에 달하는 이 장황한 글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단 세 번 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세 번 중 두 번은 <후기 Postscript>에 덧붙인 것이니 사실상 원고에서는 단 한 번 사용한 것이다. 그것도 마지막 문장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49p

죽음을 앞두고 그[=아이히만]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어떤가.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알 것 같은가? 그럴 리가 없다. 아렌트의 마지막 문장은 사형 집행 전 아이히만이 남긴 유언이 얼마나 진부하고 상투적인지를 비꼬는 것 이상의 별 역할을 하지 못한다.

 

아이히만의 유언은 아래와 같았는데, 언뜻 봐서는 어디가 '진부하고 상투적'이라는 건지, 어디가 '평범'하고 '악'하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49p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재판 참관 중인 한나 아렌트(좌측)와 그녀가 '평범하다'고 비난한 아돌프 아이히만(우측) (출처: Deutsche Welle & The Jewish New)

 

아렌트도 이를 알았는지 후기에 다음과 같은 일종의 변론을 덧붙인다.

 

<Eichmann in Jerusalem>, PenguinUSA, 287p, 번역은 필자.

[I] can well imagine that an authentic controversy might have arisen over the subtitle of the book; for when I speak of the banality of evil, I do so only on the strictly factual level, pointing to a phenomenon which stared one in the face at the trial. Eichmann was not Iago and not Macbeth, and nothing would have been farther from his mind than to determine with Richard III "to prove a villain."

나는 이 책의 부제[=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쟁이 있을 수 있었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내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순전히 사실적인 차원에서만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재판에 있었던 이라면 누구에게나 분명했을 한가지 현상을 지적했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아니었고, 맥베스도 아니었으며, 리차드 3세처럼 "악인임을 보이고야 말리라" 결단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정신과 거리가 먼 것은 없었다.
 

 

장황하지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아이히만은 대단한 악당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는 분명 '나쁜 놈'이지만, 그에겐 어떤 대단한 악마성이나 괴물성도 없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자신의 관찰이 명명백백한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복잡한 논증을 거쳤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관청어구'에 의존하는 아이히만의 진부한 말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감옥 속 아이히만의 앙상한 뒷모습(좌측)과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차드 3세>(우측) (출처: LIFE & Royal Shakespear Company)

 

그렇다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 또한 어떤 깊이를 지닌 철학적 개념이 될 수 없다. 그건 그저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인상적인 스케치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사형을 앞둔 죄인을 '별거 아닌 인간'이라며 신나게 난도질하는 아렌트의 말장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비난을 피하고 싶었는지, 아렌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악의 '평범성' 대해 이야기하며 어떤 윤리철학적 의미를 끌어내보려 시도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91p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 것이고 심지어 우스꽝스런 것이라면, ...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 생전에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것 외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는 것은, 그리고 이러한 '고상한 말'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은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아이히만과 같은 인물이 보여주는 '사유의 무능'과 '언어의 무능'이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의 씨앗이라는 교훈을 끌어낸다. 생각 없이 상투어를 쓰는 사람이야 말로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여기서 아렌트는 자신이 그렇게도 비난했던 기드온 하우스너 검사와 똑같은 짓을 저지른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언어의 무능'이라는 개인적인 특질에서 '사유의 무능'의 증거를 찾아내고, 그 '무사유'에서 그녀가 '대파멸'이라 부르는 나치 전체의, 어쩌면 인류 전체의 악을 끌어낸다. 이 지점에서 아렌트는, 유대인 '수송'을 담당했던 아이히만에게 유대인 '학살' 전체의 죄를 묻는 하우스너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6p

...하우스너 씨가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유리 부스 안의 인물[=아이히만]은 더욱더 창백해지고 더욱더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서, "바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괴물이 앉아 있다"고 소리치며 손가락질해도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찾아서

아렌트의 원고에 대한 이런 류의 불만을 들어볼 수 있는 곳이 하나 더 있다. 바로 Penguin USA가 출판한 원서 <Eichmann in Jerusalem>의 소개글이다. Amos Elon은 아렌트의 재판 참관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한다.

 

<Eichmann in Jerusalem>, PenguinUSA, p.xvii. 번역은 필자.

Her sarcasm was often self-defeating... Arendt posed the true moral issue but obscured it with needless irony... Too often she claimed a monopoly on "objectivity" and truth, ... She claimed to "understand" Eichmann better than others and freely dispensed advice to the prosecutor and defense lawyer (she despised both) and to the three judges, whom she admired.

그녀[=아렌트]의 빈정거림은 대부분 자충수였다... 아렌트는 진정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고도 그것을 불필요한 반어법으로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너무 자주 자신의 주장에만 "객관성"과 사실성이 있다고 주장했고, ... 아이히만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한다"고 주장하며 (그녀가 경멸했던 양측) 검사와 변호인은 물론, 그녀가 존경했던 세 명의 판사들에게도 거리낌없이 조언을 해댔다.

Penguin USA의 <Eichmann in Jerusalem>(우측) 에 소개글을 쓴 Amos Elon (좌측) (출처: The Guardian)

 

Amos Elon의 말처럼 아렌트는 오로지 자신만이 옳고 객관적인 것처럼 말하며, 말 그대로 모든 이를 비난하고 조롱한다.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정부와 패전 이후의 독일. 히틀러 집권 당시 유대인 학살에 동조한 주변국. 의도적이었든 혹은 의도치 않았든 나치에 협조했던 유대인 지도층과 시온주의자들. 심지어는 아이히만을 납치해 와 재판장에 세운 이스라엘 당국과 검사 측까지도.

 

모두를 향한 아렌트의 화살에서 모종의 분노를 느끼기란 어렵지 않다. 아우슈비츠를 탈출했던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렌트가 이런 분노를 느끼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문제는 그 분노가 '정의'와 '악'에 대한 어떤 깊은 통찰을 주지는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수백쪽에 달하는 그녀의 장황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전체는 이러한 눈먼 분노에 지배당하고 있다. 아렌트는 재판 과정의 편파성과 검사의 연극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도, 결국 에필로그의 마지막은 '아이히만'을 향한 자신만의 복수심 가득한 사형 선고로 장식한다.

 

<Eichmann in Jerusalem> 에필로그 마지막 문장. 번역은 필자.

... just as you supported and carried out a policy of not wanting to share the earth with the Jewish people and the people of a number of other nations - as though you and your superiors had any right to determine who should and who should not inhabit the world - we find that no one, that is, no member of the human race, can be expected to want to share the earth with you. This is the reason, and the only reason, you must hang.

이 세계에 누가 거주해야 하고 누가 거주해서는 안되는지를 결정할 권리가 마치 당신과 당신의 상급자들에게 있는 양, 당신이 유대 민족 및 수많은 타국가 민족들과 지구를 공유하지 않으려 하는 정책을 지지하고 시행했듯이, 우리는 아무도, 즉 인류의 구성원 중 그 누구도 당신과 지구를 공유하길 원하리라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만 할 유일한 이유입니다.

 

보르헤스는 <독일 레퀴엠>이라는 단편에서 나치 전범의 입을 빌려, 나치즘이 유대 민족을 포함한 전 세계에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다고 진단했다. 아렌트의 사형 선고를 가득 채운 '앙갚음에 대한 갈망'에서 그 진단이 사실임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다.

 

 

보르헤스 <알레프>, 인류의 '독일 레퀴엠'

보르헤스의 대표 단편집 중 하나인, 의 수록 작품들을 읽고 정리하고 있다. 최낙원 교수님의 글을 빌어 보르헤스를 무턱대고 읽기 가장 쉬운 방법에 대해, 그리고 보르헤스가 그 깊은 이해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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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아렌트와 이스라엘이 나치로부터 물려 받은 이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찾기 위해서이다. (분노에 사로잡힌 오늘날의 여성주의가 아렌트의 텍스트를 사랑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지 모른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 포스트들에서는 이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어야만 하는 (불행한) 독자들이 참조하면 좋을 정보와 팁들을 남겨보고자 한다. 이 괴로운 텍스트를 굳이 읽어야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쉽게 읽을 수 있길 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 - 당신에겐 '원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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