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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 - '정의의 집'에서의 '아이히만 쇼'

mayiread 2023. 6. 5. 14:25




한나 아렌트의 문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보고 있다. 지난 포스트들에서는 원서가 없이는 읽기 힘든 대목들을 살펴본 뒤,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에서 다루고 있는 재판 전 배경들을 짚어 보았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 -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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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 - 당신에겐 '원서'가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의 에 대해 다루는 연재 포스트들을 쓰고 있다. 지난 포스트는 을 읽지 않도록 설득하는 글이었다. 이 책에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만의 논리 정연한 사유를 결코 찾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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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 - 원서가 필요한 순간들

앞선 두 개의 포스트를 통해 한나 아렌트의 을 읽지 않도록 끈덕지게 설득했지만, 당신은 이미 '원서'까지 사며 이 무지막지한 글을 읽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한나 아렌트 #1 - 이 책을 읽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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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4 - 오퍼레이션 피날레

한나 아렌트의 을 읽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보고 있다. 지난 포스트들에서는 웬만하면(...) 은 읽지 말라고 설득해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이 책을 읽고야 말리라 결심한 존경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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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트에서는 본격적으로 재판 속사정을 들여다보려 한다. 책의 첫 장을 여는 '정의의 집' 챕터를 중심으로 재판에 참여한 여러 인물들을 차근차근 살펴보고, 영화 <아이히만 쇼>가 조명하는 레오 허위츠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무대가 되어버린 '정의의 집'

'정의의 집(Beth Hamishpath, 베스 하미쉬파스)'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여는 첫 단어이자, 재판을 여는 첫 단어이기도 하다(49p). 그런데 아렌트는 왜 굳이 '정의의 집'이라는 말로 글을 시작한 걸까?

 

아이히만 재판이 열렸던 예루살렘 소재의 이스라엘 대법원 (출처: 위키피디아)

 

당연히 '정의의 집'은 법정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아렌트는 단순히 법정을 지칭하는 것 이상의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

 

뒤이어 사용된 '민중의 전당(Beth Ha'am)'이라는 표현을 보자(51p). 히브리어에서는 '집(Beth)'이라는 단어에 장소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을 결합하는 것이 일반적인 용례임을 알 수 있다. 아렌트가 '정의의 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도 법정의 진정한 목적―정의를 위한 공간, 정의의 전당, 정의의 장―에 대한 것이었다. 이 재판장은 '정의를 위한 곳'이었어야 한다는 것.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52p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가장 일반적으로 묻는 물음인 "그것이 무슨 유익함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다음과 같은 대답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행할 것이다."

 

실제로 이 장의 요지는 단 하나다. '정의를 위한 곳'이었어야 했을 재판장이 그 공간의 목적을 상실하고 '쇼'를 위한 무대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7p

이 재판은 ...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런 식의 수사, 꽤나 익숙하지 않은가? 어떤 공간을 'OO의 집'이라 부르며 그 공간의 진정한 목적이 상실되었다고 개탄하는 수사 말이다.

 

그렇다. 이 수사는 예수가 성전을 '기도하는 집(Beit HaTefillah)'이라 부르며 성전의 잡상인들을 채찍으로 쫓아낼 때 사용했던 수사이다. 기독교 계에서는 이를 '성전 정화(Cleansing of the Temple)'라고 부른다.

 

<마태복음> 21:13, 개역개정 성서

기록된 바 내 은 기도하는 집(Beit HaTefillah)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성전 정화를 묘사한 Bernardino Mei의 그림(좌측) & 아이히만 재판에 참석한 한나 아렌트(우측) (출처: 위키피디아 & LIB)

 

한나 아렌트가 굳이 이런 메시아적인 수사를 사용한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던 아렌트에게도,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온주의의 교훈을 설파하려는 광대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거룩한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잡상인들에게 매운맛(?)을 보여준 예수를 상상하며, 이 광대들에게 채찍을 휘둘러 '법정 정화'를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아렌트의 눈에 비친 이 '광대들'은 분명 아주 여러명이었겠지만, 아렌트가 비난의 채찍을 가장 많이 휘두른 대상은 한 명이었다. 바로 검사장이었던 기드온 하우스너이다.

 

 

 

'아이히만 쇼'의 주연 하우스너

기드온 하우스너(Gideon Hausner)는 당시 막 세워진 이스라엘 정부의 법무부 장관이었다. 그런데 잠깐, 하우스너는 아이히만 재판의 검사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것도 맞다. 하우스너는 법무부 장관 재임 기간(1960년~1963년)의 두 번째 해에 아이히만 재판의 검사장 역할을 맡았다.

 

아이히만 재판의 검사장 역할을 맡았던 기드온 하우스너(우측에선 가장 왼쪽) (출처: 위키피디아 &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제3국에서 불법으로 납치까지 해 와 법무부 장관의 손으로 직접 기소한 전범이니, 아이히만은 당연히 죽은 목숨이었다. 일제강점기 전범을 서울로 끌고와 독립유공자들 앞에 세워놓고 재판을 한 느낌이랄까.  

 

그렇다면 판결이 이미 나온 거나 다름없는 이 기획 재판에 하우스너가 직접 검사장 역할까지 하며 열을 올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엔 당시 수상이었던 다비드 벤 구리온(David Ben-Gurion)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 같다. 모사드에게 아이히만을 불법으로 납치해 오라고 직접 지시를 내린 것이 바로 벤 구리온이었으니까.

 

아렌트는 이렇게 재판장 밖에서 마스터 마인드 역할을 했던 벤 구리온이 "국가의 설계사"라고 불렸음을 지적하며, 그가 "이 소송 절차의 보이지 않는 무대 매니저"였다고 비꼰다(51p). 하우스너를 "자기 상전에게 ... 최선의 복종을" 다하는 개처럼 묘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52p).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1~52p

... '국가의 설계사'라는 적절한 칭호로 불렸던 벤구리온은 이 소송 절차의 보이지 않는 무대 매니저로 남아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재판을 참관한 적이 없었다. 그가 법정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부를 대표하고 자기 상전에게 최선을, 그의 지도자에 대해 최선의 복종을, 전심전력을 다하는 법무장관 기드온 하우스너(Gideon Hausner) 씨의 목소리를 빌려 말했다.

 

이스라엘의 수상이었던 다비드 벤 구리온. 모사드 요원이었던 Moshe Pearlman과 함께 있다. (출처: 이스라엘 아카이브)

 

하우스너에게 이 재판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아이히만의 처형은 수상이 직접 지시한 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당시 이스라엘 국민들의 염원이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재판에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었다. 문제는 '얼마나 멋지게' 이기느냐였다.

 

하우스너는 실제로 통쾌하면서도 장엄한 승리를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아이히만을 "유대인에 대한 범죄""인류에 대한 범죄"로 기소하면서(73p), 자신이 '600만 명의 고소인'들과 함께 서 있다고 말하는데, 이 기소문은 이스라엘의 '명연설'로 회자되고 있다.

 

 

The Great Speeches - the Six Million Accusers by Gideon Hausner - Museum of the Jewish People

It was a cloudy morning on April 11th 1961, when a gaunt, thin haired man in a suit and dark glasses entered the shielded glass booth at “Beit HaAm” Museum of the Jewish People

www.anumuseum.org.il

재판장에서 찍은 기드온 하우스너 검사의 모습. (출처: Beit Hatfutsot 유대인 박물관)

 

 

아렌트는 이렇게 기세등등한 하우스너의 모습이 참 꼴보기 싫었던 듯하다. 그녀는 첫 장 내내 하우스너가 얼마나 과장되고 꼴사나운 언사를 보이는지 비판한다. 전쟁이 끝나자 감투 하나 뒤집어 쓰고는,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직접 경험했던 생존자들을 무신경한 질문들로 불편하게 하는 모습이 아렌트에게는 봐주기 어려웠던 듯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3p & 60p

검사는 ... 법정에서 자주 방청객을 힐끔거리거나, 일상적 허세보다도 더 심한 연극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백악관의 인정을 받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업무를 잘 수행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기차에 탔습니까?"
"... 왜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하우스너의 이런 연극적인 언사가 거슬렸던 아렌트는 자신만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다분히 주관적이고 미학적이다. 읽다보면 묘하게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가 떠오른달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3p

정의는 이런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아이히만 쇼'의 조연들

그렇다고 아이히만 재판을 하우스너 혼자 진행했을 리는 만무하다. 명색이 재판이니 만큼 판사들도 3명이나 있었고, 피고인 아이히만에게 변호사도 붙여주었다. 하우스너에게 질린 아렌트는 판사들과 변호사는 훨씬 더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준다. 

 

그 중 아렌트가 가장 좋아했던 인물은 재판장이었던 모셰 란다우(Moshe Landau)였다. 아렌트는 하우스너의 연극적인 언사와 판사들의 '상쾌한' 재판 진행을 비교하기까지 한다. 판사들이 허세에 찬 하우스너에게 제동을 걸어주니 꽤나 통쾌했던 것 같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59p

판사들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일부러 꾸민 듯한 걸음걸이를 하지 않았고, 그들의 맑고 강한 집중력이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청취할 때 눈에 띄게 나타났던 경직된 모습 등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증언을 무한정 끌고 가려는 검사의 시도에 대해서는 참지 않고 즉각적으로 제동을 걸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아이히만 재판의 세 판사(좌측) & 재판장이었던 모셰 란다우 판사(우측) (출처: 위키피디아 & The Shoah Memorial)

 

아이히만의 변호사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Rebert Servatius)라는 독일인이었는데,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범들을 변호한 경력으로 이름을 알린 이였다. 책에서는 계속 '세르바티우스 박사'라고 불리기 때문에, 무슨 나치의 매드 사이언티스트인 건가 착각하기 쉬운데, 그는 나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냥 '세르바티우스 변호사'라고 바꿔 읽으며 알아서 잘 이해하면 된다.

 

아이히만을 변호했던 세르바티우스 박사(좌측). 하우스너가 이끄는 검사진들 옆에 외롭게 혼자 앉아 있었다(우측) (출처: 위키피디아)

 

이제 재판장의 전경을 보면 익숙한 인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위쪽 이스라엘 휘장 아래에 앉은 세 사람이 판사들이고, 그 중 가운데에 앉은 (안경 안 쓴 대머리) 판사가 란다우이다. 그 오른쪽 아래는 증인석이고, 증인석의 반대편에 있는 부스가 피고 아이히만이 앉아 있던 곳이다. 나름 신변 보호를 위해 설치한 구조물이다.

 

아이히만 재판장 전경 (출처: 미 홀로코스트 박물관)

 

아이히만이 있는 부스와 참관석 사이에 긴 테이블 2개가 놓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아이히만 쪽에 외롭게 혼자 앉아 있는 것이 그의 변호사 세르바티우스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주르륵 떼거리로 앉아 있는 것이 검사들인데, 그 중 가장 왼쪽에 앉아 있는 (안경 쓴 대머리) 검사가 바로 하우스너이다.

 

 

 

'아이히만 쇼'의 진짜 주연은?

영화 <아이히만 쇼>는 당시 전세계 37개국에 생중계되었던 아이히만 재판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재판을 생중계하기 위해 노력했던 방송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당시 촬영 감독이었던 레오 허위츠(Leo Hurwitz)인데, 미국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다가 그의 작품들이 '좌편향'적이라는 이유로 미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아이히만 재판을 촬영하자는 밀턴 프루트먼(Milton Fruchtmann)의 권유를 받았을 당시에도 여전히 그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었다.

 

레오 허위츠(우측). <아이히만 쇼>에서는 안소니 라파글리아가 연기한다. '왓슨'역으로 유명해진 마틴 프리먼이 밀턴 프루트먼을 연기했다(좌측). (출처: IMDb & TMDB)  

 

아이히만 생중계 촬영 현장(좌측). <아이히만 쇼>에서도 재현됐다(우측) (출처: 레오 허위츠 웹사이트 & IMDb)

 

 

Television Broadcast of the Eichmann Trial - Leo Hurwitz

When, in 1961, producer Milton Fruchtman convinced the Israeli government to televise the trial of captured SS official, Adolf Eichmann, the designer of the deportation scheme for the Jews of Nazi-occupied Europe to the death camps, he turned to Leo Hurwit

leohurwitz.com

 

 

영화 <아이히만 쇼>는 레오 허위츠를 위시한 방송인들이 얼마나 많은 난관들을 헤쳐가며 이 역사적인 순간을 생중계로 담아냈는지에 집중한다. '좌파' 감독이라는 오명을 쓴 다큐멘터리 감독이, 다른 방송인들과 함께 아이히만 재판을 둘러싼 여러 위험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세계에 유대 민족이 경험한 아픔을 알리는 뜻깊은 성취를 해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가 레오 허위츠와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이의 대화이다. 레오 허위츠가 머무르던 숙소의 주인이 어느 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당신 덕분에' 온세계가 유대 민족의 슬픔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강조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아이히만 쇼>의 주연은 레오 허위츠이다.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 재판의 주연은 '기드온 하우스너'였다. 그런데 둘 모두 아돌프 아이히만의 이름을 쇼의 제목으로 쓰고 있다. 정작 아이히만은 재판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이 쇼의 진짜 주연은 과연 누구였던 걸까?

 

 

이제 드디어 한나 아렌트에 대해 이야기해볼 차례가 된 것 같다. 내 생각은 이렇다. 아이히만 쇼의 주연은 사실 한나 아렌트였다.

 

하우스너가 '시온주의의 교훈'을 설파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처럼, 아렌트 또한 자신의 현란한 (그리고 장황한) 문장들을 통해 꼭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악에는 아무런 깊이도 없다'는 것. 하우스너가 자기 상전인 벤구리온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것처럼, 아렌트 또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그녀에게 철학을 가르쳤던 카를 야스퍼스다.

 

아렌트의 철학 교수였던 카를 야스퍼스(좌측). 그가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아렌트도 함께 했었다(우측) (출처: 위키피디아 & 프린스턴 대학)

 

다음 포스트에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기 전 아렌트가 야스퍼스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영화 <한나 아렌트>와 함께 살펴보며, 그녀가 과연 어떤 말을 하고 싶어했던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그런 말을 하고 싶어했던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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