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문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쉽게 읽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보고 있다. 되도록이면 이 책을 읽지 말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싶지만, 그래도 읽고야 말리라는 굳은 의지를 보이는 독자들에게는 원서인 <Eichmann in Jerusalem>과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 <아이히만 쇼>가 도움이 될 것이라 얘기해왔다. 관련 포스트 목록은 아래를 참조.
#1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
#2 당신에게는 '원서'가 필요하다
#3 원서가 필요한 순간들
#4 오퍼레이션 피날레
#5 '정의의 집'에서의 '아이히만 쇼'
이번 포스트에서는 영화 <한나 아렌트>를 소개한 뒤, 아렌트가 제안했다고 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의 기원이 사실은 그녀의 스승 칼 야스퍼스임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이 영화는 나치즘과 아이히만 재판을 아렌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이해하는 데 어쩌면 가장 많은 도움이 될 자료일지도 모르겠다.
용감한 여류 사상가, 한나 아렌트?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과 관련된 아렌트의 활약(?)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아렌트는 The New Yorker의 초청을 받아 기자 자격으로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원고가 되는 연재 기사를 써내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의 포스트를 참조), 그 내용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을 변호하고 있다'는 오해를 산다.
영화에 따르면 이런 비난은 아렌트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오해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과 같은 '범상한 인물들(nobodies)'이 악행을 범한 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the abillity to think)'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을 뿐, 그를 변호하거나 옹호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강연 장면에서도 아렌트는 악의 기원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악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 예고편에서처럼) 유대인 동포들은 아렌트에게 엄청난 분노를 쏟아내며 그녀를 저주하는 편지까지 보낸다.
<한나 아렌트> 강연 장면 중
한나 아렌트
Trying to understand is not the same as forgiveness!
이해하려는 시도가 용서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렌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평범한 이들에 의해 행해진 악'이라는 현상을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해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다.
동포들의 증오와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은 용감한 여류 사상가, 그리하여 끝내 평범한 이들이 행한 잔혹한 악의 근원을 이해한 철학가, 이것이 영화 <한나 아렌트>가 그려내고 있는 아렌트의 초상이다.
별거 아닌, '우스꽝스러운' 악
영화가 그리고 있는 이러한 아렌트의 초상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당시 지나치게 괴물화되고 있던 아이히만을 아렌트가 '평범한' 인물로 다시 그리려 했던 것은 맞다.
아래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처럼, 당시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의 설계자'라고 불리며 유대인 학살을 기획한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 '수송'을 담당한 실무자였을 뿐, '최종 해결책'이라 불리는 유대인 대량학살 기획은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라는 곳에서 나치의 높으신 분들끼리 모여서 내놓은 것이었으니까. 아이히만도 분명 이 회의에 참석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서기' 자격으로 회의록을 작성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아이히만을 법정에 세워놓고, "유대인에 대한 범죄"와 "인류에 대한 범죄"의 책임을 물으며(73p), 600만 유대인 희생자들을 대신해 그를 처단하고야 말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가는 이스라엘 검사들의 수사에는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긴 했다. 아이히만은 아돌프 히틀러도 헤르만 괴링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아렌트가 '아이히만이 그렇게까지 엄청난 괴물은 아니잖아?'라고 지적한 것은 맞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6p
...하우스너 씨가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유리 부스 안의 인물[=아이히만]은 더욱더 창백해지고 더욱더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서, "바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괴물이 앉아 있다"고 소리치며 손가락질해도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거나, 악의 근원을 논리적·철학적으로 밝혀보려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아렌트는 사실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아이히만을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다시 말해 경멸할 만한 '별거 아닌', '대단할 것 없는' 존재로 만들고 싶어 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91p & <Eichmann in Jerusalem>, PenguinUSA, 287p, 번역은 필자.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평범한' 것이고 심지어 우스꽝스런 것이라면 ...
... when I speak of the banality of evil, I do so only on the strictly factual level, pointing to a phenomenon which stared one in the face at the trial. Eichmann was not Iago and not Macbeth, and nothing would have been farther from his mind than to determine with Richard III "to prove a villain."
내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순전히 사실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것이다. 나는 그저 재판에 있었던 이라면 누구에게나 분명했을 한가지 현상을 지적했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아니었고, 맥베스도 아니었으며, 리차드 3세처럼 "악인임을 보이고야 말리라고" 결단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정신과 거리가 먼 것은 없었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는 대목마다, 아이히만이 셰익스피어의 극에 등장하는 대단한 악당들과는 거리가 먼 '진부하고(banal)' '우스꽝스러운' 인물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미묘한 시각 차이 때문에 아렌트는 동포들로부터 '나치를 변호한다'는 오해를 받고 미움을 산 것이다.
분명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행을 과소평가하고 있지도 않고, 아이히만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도 단 한 마디조차 하지 않는다. 아이히만을 향한 자신만의 복수심 넘치는 사형 판결문까지 썼으니까. (판결문 내용은 아래 포스트의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찾아서> 꼭지를 참조)
그렇다면 아렌트는 읽는 사람을 굉장히 헷갈리게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이히만은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악당인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우스꽝스럽고 평범한 '별거 아닌' 놈이다.'
아렌트는 도대체 왜 굳이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많은 입장을 취한 걸까? 단순히 아이히만을 경멸하고 비난하고자 했다면, 다른 더 쉬운 방법도 있었다. 생각 없이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사지로 보낸 아이히만을 '공감 능력을 상실한 무정한 사이코패스'로 괴물화했어도 될 테니까. 이렇게 말했다면 동포들의 미움도 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굳이 동포들의 분노를 감내하면서까지 아이히만을 '평범하고 진부한(banal)' 인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도대체 왜?
'악의 평범성'의 기원, 칼 야스퍼스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신의 철학 교수였던 칼 야스퍼스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나치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었다.
아렌트는 이 편지에서 나치즘의 악행을 단순한 '범죄'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나치즘의 잔악함은 범죄 그 이상의, 우리가 감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이라는 것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주장은 몇 년 후 그녀의 저작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반복된다. 그녀는 칸트의 '급진적 악(the radical evil)' 개념을 빌려와, 전체주의가 지닌 '악의 급진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The Meridan Books, 459p, 번역은 필자.
... in their effort to prove that everything is possible, totalitarian regimes have discovered ... that there are crimes which men can neither punish nor forgive. When the impossible was made possible it became the unpunishable, unforgivable absolute evil which could no longer be understood and explained by the evil motives of self-interest, greed, covetousness, resentment, lust for power, and cowardice; and which therefore anger could not revenge, love could not endure, friendship could not forgive.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노력 가운데, 전체주의 정권들은 인간이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범죄가 존재함을 발견해내었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자, 그것은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절대적 악이 되었다. 이 절대악은 더 이상 이기심이나 탐욕, 시기, 적개심, 권력욕, 비겁함과 같은 악한 동기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분노로도 복수할 수 없고, 사랑으로도 견뎌낼 수 없으며, 우정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혹시 눈치챘는가?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60년대에 '악의 평범성'을 내세우며 아이히만이 우스꽝스럽고 별거 아닌 존재라고 그렇게도 강조한 아렌트가 약 10여 년 전에 출간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는 '악의 급진성'을 내세우며 악을 가공할 만한 어떤 것으로 보고 있다.
아렌트가 이렇듯 '악의 급진성'에서 '악의 평범성'으로 돌아서게 한 데에는 야스퍼스의 편지가 큰 역할을 했다. 나치즘을 가공할 만한 절대악으로 보는 아렌트에게 야스퍼스가 아래와 같이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1946년 10월 19일 ~ 23일 야스퍼스와 아렌트가 주고받은 서신. 번역은 필자.
... a guilt that goes beyond all criminal guilt inevitably takes on a streak of “greatness” — of satanic greatness — which is, for me, as inappropriate for the Nazis as all the talk of the “demonic” element in Hitler and so forth. ... we have to see these things in their total banality, in their prosaic triviality ... Bacteria can cause epidemics that wipe out nations, but they remain merely bacteria.
모든 범죄를 넘어서는 죄란 필연적으로 어떤 "위대함"의 결을, 어떤 악마적 위대함의 결을 지니게 된다. 내가 보기에, 나치에게 어떤 악마적 위대함이 있다고 하는 것은, 히틀러 같은 이들에게 어떤 "악마적" 요소가 있다고 하는 이야기들만큼이나 부적절하다. 우리는 이것들[=나치와 나치의 악행들]을 지극히 평범한(total banality) 것으로, 따분하고도 사소한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박테리아가 온 나라를 휩쓰는 전염병을 유발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그저 박테리아일 뿐이다.
요약하자면 나치즘을 '해로운 박테리아'와 같이 지극히 평범하고(total banality), 따분하며 사소한 것(prosaic triviality)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범죄를 차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가공할 만한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들이 (악마적인 의미에서) 위대하고 거대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는 악인들을 신화화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어떤가. 나치를 바라보는 야스퍼스의 시선이 아이히만을 바라보는 아렌트의 시선과 너무나도 닮아 있지 않은가. 야스퍼스는 나치를 박테리와 같은 지극히 따분하고 '사소한' 존재로 보려 했고, 약 15년 후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평범하고 진부하며 '별거 아닌' 존재로 보려 했다.
그렇다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의 기원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한나 아렌트일까? 아니면 칼 야스퍼스일까? The New Yorker는 그 기원을 야스퍼스에게서 찾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악의 평범성'은 아렌트의 철학적 성취로 인용되고 있다. 나치즘과 대비될 만한 극악무도한 범죄들은 '용감한 여류 사상가'의 가이드에 따라 '사소한 박테리아'로 취급받고 있다.
이 가이드가 '악'에 대한 어떤 깊이 있는 통찰이나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절대로 너 같은 자식을 대단하게 보이게 할 순 없어, 이 박테리아 같은 자식!'과 같은 말로 상대를 처벌하고 싶어 하는 언어적 복수심이 그 뒤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치즘이나 n번방과도 같은 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내 생각은 이렇다. 야스퍼스의 말을 좇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던 아렌트는 틀렸다. 하지만 <전체주의의 기원>을 쓰던 아렌트는 옳았다.
우리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렌트가 아닌, '악의 급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렌트의 말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아렌트의 말처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과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시도가 악을 탄생시킨다.
사실 아렌트는 불가능이 가능케 되는, 그리하여 비로소 악이 탄생하는 그 구체적인 순간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포착하고 있다. 바로 나치의 '언어 규칙(Sprachregelung, Speech Code)'이 작동하는 순간들이다.
연재의 마지막이 될 다음 포스트에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나치의 언어 규칙을 다루는 대목들을 살펴보며, 이 언어 규칙이 어떻게 악의 기원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왜 이 언어 규칙을 결코 '사소하고 평범한(banal)'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됐던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읽기 > 한나 아렌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나치의 시작과 끝, 뉘른베르크 (0) | 2023.06.07 |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 - '정의의 집'에서의 '아이히만 쇼' (0) | 2023.06.05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4 - 오퍼레이션 피날레 (0) | 2023.05.19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속 시온주의 & 이스라엘 건국사 (0) | 2023.05.19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 - 원서가 필요한 순간들 (0) | 2023.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