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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폴이 될 수밖에 없는 조제들의 이야기

mayiread 2022. 4. 20. 12:12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은 '외로움'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은 감수성 넘치는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 온 작가이고, 역시나 감수성 넘치는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자 하는 다른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이기도 하다. 사강의 여러 작품 중, 민음사에서 번역해 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페이지 표기가 유동적인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그래서 이 포스트에서는 출처를 페이지(p.)가 아닌, 장(Ch.)으로 표기했다.

 

 

 

창작자들이 사랑하는 Saganian Heroine 

​사강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써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을 시작으로, 줄곧 사랑, 연애, 결혼 등의 남녀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작품 세계와, 그 (뻔하다면 뻔한) 남녀 관계 속에서 섬세한 감수성을 권태롭게 드러내는 그녀만의 여성 주인공, Saganian Heroine을 그려내왔다.

 

 

프랑수아즈 사강 연보

1954년 소설 [슬픔이여 안녕] 출간.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나 첫해 시험에서 낙제. 소설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을 출간해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그해 비평가 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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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의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의 모습. 애연가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출처: CR Muse)



다른 창작자들이 주로 레퍼런스로 삼는 것이 이 Saganian Heroine인데,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나 이를 리메이크한 김종관 감독의 <조제>에서는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 Dans un mois, dans un an> 속 여주인공, '조제 Josée'로 불리고자 하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이 '조제 Josée'라는 이름은 사강의 다른 작품 속 여주인공들의 이름으로도 사용되는데, <잃어버린 프로필 Un profil perdu>, <신기한 구름 Les merveilleux nuages>이 그 예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Daum영화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

movie.daum.net

 

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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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문학동네로부터 젊은작가상을 받은 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이나 2020년 8월부터 방영된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도 '폴 Paule'이라는 Saganian Heroine이 등장하는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Brahms...>의 제목을 그대로 등장시킨다. SBS 드라마는 사실 이름만 가져다 썼고, 백수린의 단편에는 이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온다.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YES24

“‘지금-여기’의 한국소설과 만나는가장 확실한 패스트 트랙”등단 10년 이하의 젊은 작가들이 한 해 동안 발표한 중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일곱 편을 선정해 수여하는 젊은작가상. 2010

www.yes24.com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방송종료 매주 월,화 밤 10시

programs.sbs.co.kr

 



'외로움'의 작가, 사강

그렇다면 Saganian Heroine이 도대체 어떤 캐릭터이기에, 오늘날까지도 여러 대중 매체에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일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각설하고 사강의 '조제'와 '폴'을 직접 만나러 가보자. 먼저 <한 달 후, 일 년 후>의 결말 부분.

'조제'와, 그녀를 사랑하는 '베르나르' 사이의 대화인데, 조제는 베르나르가 자신을 사랑함을 알지만 '자크'라는 다른 남자에게 빠져 있다. (그렇다. 삼각관계다. 연애 소설 작가를 읽으면서 무얼 기대했는가.) 베르나르의 첫 대사 속 '그'는 자크를 의미한다.

 

<한 달 후, 일 년 후>, 소담출판사, 186~187p.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잠시 힘을 주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조제를 향한 자신의 사랑도, 자크를 향한 조제의 사랑도, (다른 모든 사랑처럼)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며, 결국 우리 모두 고독해질 것이라 말하는 베르나르. 조제는 상냥하게 그의 손을 잡아주며 힘내라는 듯 다그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조제는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하는지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사랑은 끝나기 마련인 덧없는 것에 불과하고, 결국 그 누구도 고독을 피해 갈 수 없지만, 이런 현실에 괴로워해서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그저 그것이 전부일뿐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폴'은 어떨까. 바람기 다분한 '로제'의 연인이자 프리랜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등장하는 중년의 여인 폴은 맨날 자신을 혼자 잠들게 내버려 두는 로제를 원망하며 괴로워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Ch. 1.

남자든 아이든,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녀를 필요로 하는 이, 잠들고 깨는 데 그녀의 온기를 필요로 하는 이라면.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로제는, 아마도, 가끔은 그녀를 필요로 하리라...... 하지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잠들고 깨는 데 필요하다거나 열정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만 필요로 할 뿐임을 그녀는 때때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가슴 아프게 고독을 되씹었다.

1961년 <Goodbye Again>으로 영화화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바람기 넘치는 '로제'와 우아함을 간직한 '폴'의 모습을 잘 담아냈다.

 

  같은 영화 속 '시몽'의 모습. 젊고 똑똑하지만 '행복한 몽유병자(Ch. 12)' 같은 분위기가 엿보인다.  (출처: Amazon Anybody Got A Match?)

'Goodbye Again'의 예고편




아름답고 독립적인 중년 여인의 이런 절절한 외로움으로 시작한 소설은, '시몽'이라는 젊은 미남과의 열애와, 로제와의 극적인 화해를 거치고 나서도,끝내 폴을 그 외로움에서 건져주지 못한다. 로제의 고해를 듣고 '구원받은 듯한 기분'을 느끼던 폴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제가 다시 이전의 습관을 되찾은 것을 예감할 뿐이다. 역시나 소설은 그렇게 찝찝하게 끝이 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Ch. 18.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결국 사강의 여주인공[Saganian Heroine]들은 이러저러한 남녀 관계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는 '사랑의 무의미함'이나, 그로 인한 '숙명적인 외로움'을 주요한 정서로 다루고 상술하는 다분히 (연애) 심리적인 캐릭터들인 것. 때문에 이별(혹은 사랑)을 겪은 후 마음을 정리할 때 보기 좋은, '결국 사랑도 끝날 수밖에 없는 거니까', '누구나 고독한 거니까' 감성의 작품이라면, 사강의 여주인공들을 한 번쯤은 레퍼런스 삼아 들춰볼 만한 것이다.



사랑의 죄엔 고독형을

그런데 '사랑'과 '고독'에 대한 이런 사강적 감성들, 너무 비관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가? 사랑은 덧없고, 어차피 누구나 고독한 것이라니... 그래서인지 사강의 소설을 들춰본 다른 작가들은 꼭 다소 희망적인 결말을 통해 균형을 맞추려 든다.

'조제'로 불리길 원했던 영화 속 여주인공은 가슴 아픈 이별 후 전동휠체어를 타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여주인공 쿠미코는 하반신 장애를 지녔는데, 연인인 츠네오에게 진지한 관계로 나아갈 마음이 없음을 알게 된다.

 

쿠미코는 츠네오를 떠나보낸 후 전동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담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 ㅍㅍㅅㅅ)

 


SBS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상처받고 상처받더라도 계속 사랑하리라' 풍의 손발이 없어질 것 같은 대사를 읊어대며 잘생긴 남자 주인공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전진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그린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엔딩



과연, <한 달 후, 일 년 후>의 결말 속 조제의 대사를 다시 뜯어보면, 사랑의 무의미함과 고독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베르나르를 성숙한 상냥함으로 따뜻하게 위로하는 조제가 묵묵히 무의미한 고독의 시간을 이겨내 온사강적 서사의 '여성 영웅[Heroine]'인 것마냥 보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미쳐버리게 된다'는 조제의 마지막 대사는 사실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무의미한 사랑과 고독의 숙명을 직시하려는 강인한 모습도, 그런 숙명을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미쳐버릴 수는 없으니' 사랑의 무익함과 숙명적 고독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고만 하는, (초연한 척하지만) 어쩌면 비겁한 인물처럼도 보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폴은 어떨까? 그녀는 이미 (경제적 독립을 기반으로 한) 중년 여인의 성숙함으로, 자기감정의 모순과 이중성을 직시할 줄 아는 인물이긴 하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는' 위 영상 속 여주인공들과도 같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의지'로 가득 찬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어느새 '힘들고 모욕적이고 복잡한 세계'에 몸담게 된 후로는(Ch. 16), '그녀에게는 자유가 고독을 의미할 뿐'임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다(Ch. 1).

폴은 시몽과 로제를 향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로제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으며, 그로 인해 완벽한 안정감을 갖고 있다는 것(Ch. 1), 그렇기에 로제가 '완벽하게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부끄러움 없이 솔직히 직시한다(Ch. 15). 시몽과의 불장난 중에도 로제와의 관계로 돌아가길 원하는 자신의 이중성을 직시하며, '사랑스러운 희생양' 시몽에게 결국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자신의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소유욕(Ch. 15)'과 '끔찍한 쾌감(Ch. 16)'을 솔직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역시나, 폴 또한 사강적 서사의 여성 영웅으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그녀는 시몽의 연애편지를 통해 촉발된 '난 브람스를 좋아하는 걸까...'라는 자아에 대한 질문을 결국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하고, 헌신적인 시몽과의 열애 후에도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라고 한탄하며,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시몽을 부러워할 뿐이다(Ch. 18).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Ch. 6.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폴은 로제로 인해 그렇게 외로움에 몸부림쳤으면서도 시몽을 굳이 떠나보내고 자신에게 헌신하지 않는 로제와의 관계로 '습관처럼' 되돌아가는데,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이유를 폴은 다음과 같이 (역시나 솔직하게) 설명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Ch. 16.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러운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이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이처럼 폴은 '여성 해방'이나 '자유'를 부르짖는 여성주의적 영웅도 아니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로맨스 서사의 영웅도 아니다. 그녀는 사과를 하러 온 로제와 그의 담배 냄새를 맡으며, '구원받은 듯한 기분'과 '길은 잃은 기분'을 동시에 느끼는, 그리고 결국 다시 반복되는 로제의 외도와 자신의 외로움을 견뎌내야 하는, (그놈의) 사랑 속에서 갈팡질팡 어리둥절하는 여인일 뿐이다(Ch. 18). 사강은 시몽의 눈과 입을 빌려 이런 폴의 '권태로운' 모습을 묘사하고, 그녀에게 고독형을 선고하는 복선을 깔아 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Ch. 4.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전반적으로 무관심해진 게 언제부터인 것 같아요?"

...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사강의 감성을 차용하면서도 '견딜만한' 희망적 엔딩을 고집하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사강은 끝까지 철저하게, 사랑에 대한 헛된 희망에서도, 고독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여성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


작품 해설을 쓴 김남주 선생님은 이러한 결말에 대해 '각성의 엔딩'이라 표현하셨는데, '미쳐버리게' 될까 봐 무서워서 숙명적 고독과 사랑의 무의미함을 직시하지 않으려 하는 우리의 '제정신' 조제에게 '미치든, 미치지 않든 고독은 피해 갈 수 없어.'라고 소리 지르는 사강의 시한부 선고와도 같달까. 초연한 척 베르나르의 손을 잡았던 조제도 결국엔 그 시한부 선고 끝에서 폴과 같이 '무력하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Ch. 11.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겨울의 단조로운 나날, 고독한 그녀 앞에 끝없이 펼쳐진 집과 상점 사이의 똑같은 길들, 로제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수치심과 더불어 수화기를 든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지독히도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전화, 그리고 영영 되찾을 길 없는 긴 여름에 대한 향수, 그 모든 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한다.'라는 절박감과 더불어 그녀를 무력하고 수동적으로 만들었다.

 


사랑을 비웃은 연애 소설 작가, 사강

사실 '사랑'과 덧없는 '열정'을 구분하며 남녀 관계에서 구원을 찾지 못하는 폴의 감성은 사강 자신의 감성과도 일치한다. 그녀는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아래와 같이 대답하고, 두 번째 남편과의 짧은 결혼 생활 끝에도 다소 냉소적인 코멘트만을 남겼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

결혼이란 아스파라거스에 비니그레트 소스를 곁들이느냐 네덜란드식 소스를 곁들이느냐의 문제, 곧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기(Guy)에게'라는 제사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기'는 사강의 첫 번째 남편인 '기 쇨레(Guy Schoeller)'를 가리킨다. 사랑에 대한 회의와 외로움으로 가득한 이 소설을 남편에게 전하는 편지처럼 쓴 것. (당연히도) 사강은 이 소설을 쓴 다음 해에 남편과 이혼했고, 로버트 베스토프(Robert Westhoff)와의 짧은 재혼마저 끝난 후에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사강의 첫 남편 기 쇨레(위)와 두 번째 남편 로버트 베스토프(아래) (출처: Filolen, Smokewoman.org)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베르나르의 손을 잡아주는 조제의 모습도, 로제와의 관계에 쏟은 노력에 자신의 자존심까지 걸었던 폴의 모습도, 사실 사강 본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사강 자신과 가장 가까운 모습은 '행복해져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자유를 찾아 떠났던 젊은 시절 폴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사강은 세간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그 어떤 남녀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녀 자신만의 쾌락을 좇는 삶에 열중했다. 유명한 스피드광이자 자동차 애호가였고, 거듭된 속도위반 끝에 사고를 냈다가 치료 중에 사용한 모르핀에 중독되는가 하면, 나중엔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대중의 비난이 쏟아지자 한 TV 쇼에 출연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돈이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버스에서 우느니 재규어에서 우는 편이 낫다."라는 그녀의 말도 이런 그녀의 삶의 궤적을 잘 보여준다.

사강은 유명한 스피드광이었는데, 결국 차 사고를 내 부상까지 당한다. (출처: TinHouse, FranceSoir)

 

 
이외에도 사강의 비행에 대한 기록은 더 많지만, 그녀가 건강한 작가이자 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이리라. 더 중요한 건, 그녀가 어쩌면 자신의 여성주인공들을, (그 뻔하디 뻔한) 남녀 관계를 벗어나 존재하지 못하는 이 Saganian Heroine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선 경멸하고 비웃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강이
자신의 비관적 사랑관과 인생관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면, 스포츠카와 마약에 둘러싸여 '고독'조차 잊고 자기 자신을 파괴할 권리마저 마음껏 누린 그녀가 '그까짓 말도 안 되는 사랑'에 목을 매는 히로인들에게 '청승 떨고 앉아 있군...'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있었을까.

사강의 주제와 캐릭터들이 18살 때의 베스트셀러 처녀작을 벗어나거나 넘어서지 못했다면, 그건 사강에게 그 주제와 캐릭터들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또 하나의 베스트셀러가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을 똑같이 공유하면서도, "사랑해야만 해요"라고 글을 맺는 <자기 앞의 생>의 꼬마 화자와 '이미 다 알아'라고 글을 맺는 사강의 두 소설 속 여성 화자들은 읽는 이를 뒤흔들어 놓는 서사적 힘에 있어, 그 정도를 (매우) 달리한다.
 

 

자기 앞의 생 - YES24

유일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작가 로맹 가리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휴머니즘의 작가’로 알려진 로맹 가리는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유태인이다. 2차세계대전

www.yes24.com

 

김남주 선생님께서 '각성의 엔딩'이라 표현하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결말이 유난히도 김 빠지고 허무하게, 심지어는 허술하게까지도 느껴진다면, 그건 문학을 읽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종종 진부한 진리에 대한) 어떤 '각성'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만의 진리와 편견을 깨부숴 줄, 그래서 '자신'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충격'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무상함을 목도하고서도 "사랑해야만 한다"라고 고집을 부리는 꼬마 화자의 비합리적인 강인함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느끼는 충격은, '야, 야, 사랑? 그딴 거 다 소용없는 거야'라고 핀잔을 주며 가르치려 드는 왕년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주는 불편함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래서 (라신의 반열에 올랐다던) 사강을 읽는 즐거움은 오늘날 여성잡지와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는 즐거움에 의해 빠르게 대체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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