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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 - 원서가 필요한 순간들

mayiread 2023. 5. 8. 15:05

 

 

앞선 두 개의 포스트를 통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지 않도록 끈덕지게 설득했지만, 당신은 이미 '원서'까지 사며 이 무지막지한 글을 읽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 -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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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 - 당신에겐 '원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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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이제 서론은 접어두고, 원서가 필요한 순간들을 같이 몇 개만 살펴보자.

 

 

 

재판의 주연, 아이히만?

처음으로 살펴볼 대목은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후기>의 한 부분이다. 이전 포스트에서 밝혔듯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단 세 번 사용하기에,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 꽤 중요한 대목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 -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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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선욱 교수의 번역부터 읽어보자.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를 붙인 것에 대한 논쟁을 의식하며 코멘트한 대목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91p

나는 ... 진정한 논쟁이라면 이 책의 부제에 대한 것이어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위의 문장을 읽고 아이히만이 도대체 무엇을 연기(=주연)했다는 것인지, 그리고 '악인임을 입증'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주연'이 무슨 현상학에서 활용되는 철학 용어인 건 아닌지, '악인임을 입증'하는 어떤 법리적인 절차가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단순한 오역이다. 원문을 읽어보자.

 

<Eichmann in Jerusalem>, Penguin USA, 287p, 번역은 필자.

[I] can well imagine that an authentic controversy might have arisen over the subtitle of the book; for when I speak of the banality of evil, I do so only on the strictly factual level, pointing to a phenomenon which stared one in the face at the trial. Eichmann was not Iago and not Macbeth, and nothing would have been farther from his mind than to determine with Richard III "to prove a villain."

나는 이 책의 부제[=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 대해서도 진지한 논쟁이 있을 수 있었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내가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순전히 사실적인 차원에서만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재판에 있었던 이라면 누구에게나 분명했던 한 가지 현상을 지적했을 뿐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아니었고, 맥베스도 아니었으며,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보이고야 말리라" 결단하는 것만큼이나 그의 정신과 거리가 먼 것은 없었다.
 

 

번역가가 오역(혹은 대충 번역)한 부분은 두 곳이다. 'stared one in the face'와 'prove a villain'.

 

먼저, stare (someone) in the face의 'stare'는 '(빤히) 쳐다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stare (someone) in the face는 누군가를 얼굴을 보며 빤히 쳐다보는 것이니 '정면으로 쳐다보다'라는 뜻이고, 여기서 주어가 사람이 아닌 어떤 현상이나 사실이 되면 '분명하다'라는 뜻이 된다. 어떤 사실이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니, 그 사실이 내게는 피할 수 없이 분명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면 된다.

 

<Merriam-Webster 영영 사전>, 표제어 stare (someone) in the face

Failure was staring him in the face.
실패가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 실패할 것이 그에게 분명해 보였다.

 

Definition of STARE (SOMEONE) IN THE FACE

to look directly into the eyes of (someone) —usually used figuratively for something that should be apparent… See the full definition

www.merriam-webster.com

 

그렇다면 'a phenomenon which stared one in the face at the trial' 또한 어렵게 읽을 필요가 전혀 없다. 아렌트는 그저 아이히만이 (이아고, 맥베스, 리처드 3세와 같은) 대단한 악당이 아닌 범상하고 진부한(혹은 찌질한) 인물이었음이 모두에게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a phenomenon which stared one in the face at the trial
⇒ 한길사의 번역: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 주연한 현상
 재번역: 재판에서 모두에게 분명해 보였던 한 현상

 

그렇다면 '주연한'이라는 말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일까? 아마도 김선욱 교수는 stared를 동사 star(주연하다, 출연하다)의 과거형[starred]으로 잘못 읽었던 듯하다. 바로 뒤에 이아고, 맥베스, 리처드 3세와 같은 셰익스피어의 유명 비극 악당들이 언급되니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감옥 속 아이히만의 앙상한 뒷모습(좌측)과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차드 3세>(우측) (출처: LIFE & Royal Shakespear Company)

 

그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to prove a villain)' 결심했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건 리처드 3세의 유명한 대사를 직역한 결과인 듯한데, 보통은 아래와 같이 '악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번역한다. prove에는 무엇을 증명하고 입증한다는 뜻이 있기에, 어떤 역량이나 자격을 증명해 보인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이런 의미를 살리려면 '내가 악당이라는 걸 제대로 보이고야 말리라'고 절치부심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The Hollow Crown이라는 시리즈물에서 리처드 3세를 연기하는데, 곱추의 굽은 등을 보이며 이 대사를 씹어먹듯 읊는 무시무시한 바이브를 느껴보면 조금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운명으로부터 버림받은 분노를 불태우며 악당이 되기로 결심하는 빌런의 모습이랄까.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이 정반대의 모습으로 상상하면 되겠다.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I am determined to prove a villain
And hate the idle pleasures of these days.
나는 악인이 되기로
그리고 오늘날의 나태한 기쁨들을 증오하기로 결심한다.

 

 

 

 

'배울 자세가 안 되어 있는' 생존자들?

다음은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에 참석했던 유대인 방청객들을 묘사하는 대목이다. 아렌트는 검사가 과장되고 경솔한 언사로 유대인 방청객들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고 묘사한다. 그런데 김선욱 교수의 번역문에는 다소 어색한 묘사가 하나 끼어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6p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유대인 방청객들]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슴속 깊이 알고 있으며, 그래서 어떤 교훈도 배울 자세도 갖춰져 있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의 결론을 이끌기 위해 이 재판이 필요하지도 않은, 나처럼 유럽에서 이주한 중년과 노년의 '생존자'들이었다.

직접 재판에 참여해 하우즈너 검사(우측)의 과장된 언사를 비판했던 한나 아렌트(좌측) (출처: Deutsche Welle & ANU 유대인 박물관) 

 

아렌트 본인도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생존자'였고, 때문에 재판에 참석한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예외가 있다면 이스라엘의 법무부 장관이자 당시 검사였던 기드온 하우즈너. 잔혹한 전쟁이 끝나니 떡하니 장관 자리 하나 차지해놓고, 이제 자신이 마치 '유대 민족의 한'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기세 등등한 모습이 꼴보기 싫었던 듯하다. 

 

그런데 김선욱 교수의 번역문을 읽다보면 다시 헷갈리기 시작한다. 아렌트는 하우즈너 검사가 보여주고 있는 교훈에 생존자들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왜 생존자들에게 '어떤 교훈도 배울 자세도 갖춰져 있지 않다'라는 신랄한 비판을 한 걸까? 아렌트야 모두까기 인형이니 이번엔 생존자들이 타겟이어도 이상할 게 없는 걸까? 이런 고민들로 머리가 복잡해졌다면, 이것도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이번에도 단순한 오역이다. 

 

<Eichmann in Jerusalem>, Penguin USA, 8p. 번역은 필자.

It was filled with "survivors," with middle-aged and elderly people, immigrants from Europe, like myself, who knew by heart all there was to know, and who were in no mood to learn any lessons and certainly not need this trial to draw their own conclusions.

그곳[=재판장]은 나와 같은 중-노년의 유럽 이주민 "생존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미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어떤 교훈 따위를 배울 기분도 아니었으며,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데에 이 재판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방청객들에게 '배울 자세가 안 되어 있네, 자세가!'하고 핀잔을 주고 있었던 게 아니다. 그저 그들의(혹은 자신의) 기분이 얼마나 상했는지를 묘사하고 있었을 뿐이다.

 

검사 측이 거듭 새로운 증거로 제시하는 사실들 모두 이 '생존자'들이 이미 겪은 일이었다. 그 전쟁의 참상을 절대로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모두 기억하고(know by heart)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검사가 그런 끔찍한 기억들을 굳이 증거로 떠올리며 '유대 민족의 한'이니 '나치의 인종차별적 대역죄'니 하는 수사들을 읊어봐야, 그런 훈화 말씀 따위는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던 것(in no mood to learn any lessons)이다.

 

'mood'는 기분이니 be in no mood to'~할 기분이 아니다'라고 해석하면 되는데, be not in the mood to~의 형태로도 쓰인다. 그러니 이 문장에서 방청객들의 불량한 태도나 자세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해야 하는 생존자들이 과장된 검사의 수사를 들으며 언짢아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히만 재판의 방청객들. (출처: Yad Vashem 홀로코스트 추모센터)

 

 

 

같이 읽을 사람이 필요하다면...?

원서를 함께 보면 좋을 대목을 겨우 두 곳 살펴본 것인데 글이 이렇게나 길어졌다. 벌써 6,000자가 넘는다. 지면의 한계도 한계지만, 엄연히 독점 판권 계약이 되어 있는 원서를 더 번역해 게시해봐야 내 신상에 좋을 것이 없기도 하다.

 

그러니 '읽어도 될까요'의 블로거인 필자를 적극 활용해보시길 권해본다. 이 글의 댓글이나 방명록으로 도저히 읽히지 않는 번역문이나 원문을 남겨준다면, 내 실력과 시간이 닿는 한 함께 읽어보고자 한다.

 

물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기 위해 필요한 건 원서만이 아니다. 조금 더 접근성 높고 재밌는 영상들도 많다. 아렌트는 전시와 당시의 여러 지정학적·역사적 배경들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언급하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그려볼 수 있는 영상들을 몇 개만 보아도 책을 독파하는 데에 정말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다음 포스트에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며 함께 시청하면 좋을 영상 자료들을 몇 개 소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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