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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교수, <아픔이 길이 되려면> #1 - 죄인의 아픔도 아픔일까

mayiread 2022. 4. 18. 17:34

 

 


오래전 직장 동료들과 함께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독서모임을 했었다. 언뜻 보고는 안타까운 사연만 늘어놓으며 '뻔한 말', '맞는 말'만 하는 그런 류의 책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동료들과 얘기하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깨졌던 기억이 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 YES24

혐오발언, 구직자 차별, 고용불안, 참사…사회적 상처는 우리 몸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데이터가 말해주는 우리가 아픈 진짜 이유『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공중보건의사 시절부터 김승섭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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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 교수는 클래식하다 못해 구태연한 소리나 해대는 꼰대 선생이 아니었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학자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그를 흥미로운 저자로 만든다.

 

 

 

'죄와 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는 스스로를 '사회역학자'로 소개한다. 사회역학에 대한 그의 한 줄 소개는 다음과 같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5~6p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입니다.

 

그렇다. 굉장히 정의롭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저자가 속해 있는 곳도 의과대학이 아닌, '보건정책관리학부'이다. 그는 단순히 의술을 갖춘 의사가 아니라, 아픔의 사회적 책임을 찾아 그것을 '부조리'하다고 지적하고, 더 나아가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그 부조리를 해결해야 하는지를 '보건정책'으로 이야기하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사회적 윤리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학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김승섭 교수가 이렇게나 '정의로운' 학문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꽤 흥미롭다. 김승섭 교수는 다름 아닌 교도소의 공중보건의로 자원하여 군 복무를 했는데, 이를 계기로 '재소자'의 건강 문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던 것. 관련하여 한겨레<수감자의 아픔도 아픔이다>라는 기고글도 올렸고, 이 저서에도 다소 수정된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수감자의 아픔도 아픔이다

⑥ 재소자 건강권: 재소자·교도관의 인권과 아픔이 뒤엉킨 교도소…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아플 때 방치당하는 징역은 없다

h21.hani.co.kr


'하고 많은 아픈 사람 중에 굳이' 죄를 지은 범죄자의 아픔에 대해, 그것도 매우 진정성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정의로운' 학문적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범죄자에게 인권은 없다'라는 새로운 정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현시점에, 좌파든 우파든, 죄인이든 아니든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을 지닌 저자가 과연 '죄와 벌'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해줄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죄인의 아픔도 아픔일까

저자가 수감자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책의 후반부에서인데, 앞서 소개된 기고글의 제목보다는 다소 톤 다운된 <교도소에서 의사로 일한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9쪽 밖에 안 되는 짤막한 글이다. 여기서 저자가 마주하는 수감자들은, 보르헤스의 <독일 레퀴엠>에 등장하는 나치 고문기술자처럼 문학적·역사적 장치로 미화하거나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살인이나 성범죄 같은 무거운 범죄를 저지르고 수형소에 와서도 의사인 저자를 협박하는 유형의 범죄자들이다(247p).

 

 

보르헤스 <알레프>, 인류의 '독일 레퀴엠'

보르헤스의 대표 단편집 중 하나인, <알레프>의 수록 작품들을 읽고 정리하고 있다. 최낙원 교수님의 글을 빌어 보르헤스를 무턱대고 읽기 가장 쉬운 방법에 대해, 그리고 보르헤스가 그 깊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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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저자는 굳이 교도소 공중보건의로 자원하여, 감옥에서 살아가는 수감자들이 일반인들보다 더 아프다는 내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써낸다(247~248p).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도 느끼고 있을 그 감정에 대해 언급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249p.

다른 취약계층도 많은데, 왜 하필 죄짓고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냐고요... 가벼운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야 그렇다고 쳐도 성폭행이나 살인으로 들어온 이들에게도 그런 치료를 해주는 게 맞느냐고, 그들의 인권도 존중해야 하는 것이냐고...

 

그리고 이에 저자는 놀랍게도 (하지만 '작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249p.

인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 조심스럽지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승섭 교수의 이 '조심스럽고 작은' 목소리는 국가인권위가 발주한 연구 보고서에서는 훨씬 더 크고 당당하다.

 

국가인권위원회 (2016), <구금시설 건강권 실태조사>, 1p.

2. 연구 목적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인권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구금시설 수용자의 건강권의 실태를 조사하고 미충족 수요의 관점에서 평가하여 실질적인 질적, 양적 향상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검토한다.

 

인권정책자료 | 국가인권위원회

 

www.humanrights.go.kr

 


'건강권'으로 대표되는 범죄자의 인권 수준이 곧, 국가 인권 수준의 평가 기준이라는 것이다. 가히 헌법적 '천부 인권' 수준의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인권 인식이다. 그러나 재소자의 서사를 다루는 저자의 방식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원칙적이지 않다. 김승섭 교수는 자신이 직접 접한 다양한 '죄'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246~247p.

차마 글로 적을 수 없는 수준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해한 여성 재소자나 오랫동안 군복무를 하다가 퇴직한 뒤 사기 사건에 얽혀 교도소에 온 남성 재소자를 진료할 때면,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죄와 벌이라는 게 무엇이고, 그 판단은 누가 해야 하는지 제 경험으로는 판단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죄 사건 뉴스의 댓글 등에서 '사형, 무기징역'에서부터 잔인한 온갖 옛 형벌들까지 들먹이며 쉽게들 하는 그 '죄와 벌'에 대한 판단을, 저자는 어렵다며 보류하고 있다.



범죄도 아픔도, 공동체의 것이라면

범죄자들의 협박과 폭력을 직접 경험한 김승섭 교수가, 이렇게도 '죄와 벌'에 대한 판단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정말 많은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그가 범죄자의 건강권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승섭 교수가 사회역학의 탄생을 소개하는 글,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로 가보자. 저자는 낸시 크리거 교수의 논문, <역학과 원인의 그물망: 거미를 본 사람이 있는가?>를 소개하며, 질병의 얽히고설킨 다양한 원인의 그물망 뒤에는, 이 그물망을 만드는 거미와 같은 '사회적 환경'이 있음을 지적한다(57p).

안전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높아진 금연율, AIDS/HIV 치료제의 공공 지원을 통해 낮아진 사망률,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인해 높아진 결핵 사망률, 세 가지 예시를 통해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이다. 건강은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것.

<아픔이 길이 되려면>, 71~72p.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이들을 아프게 했던 '원인의 원인'이 보입니다. 그 원인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김승섭 교수가 정말로 개인에게 닥쳐오는 죽음과 질병과 같은 불행 또한 공동체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에겐 범죄자의 죄와 벌도 온전히 범죄자 개인의 것이 아닐 것이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과관계의 거미줄 속에서, 죄와 벌의 무게가 범죄자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모두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책임을 범죄자 개인에게 묻는 일을 망설이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덜 아픈 사회'를 위한 공동체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곧, 서로를 아프게 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책임을, 그리고 그런 우리 모두의 '죄와 벌'을 마주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범죄자 개인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책임은 금연을 하지 못한 폐암 환자가 지는 책임과 비슷하게 이해되지 않을까.

김승섭 교수의 눈에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아픔의 원인'이자, '죄의 원인'이고, 이 원인의 그물망을 끊어내기 전까지 우리 사회는 '질병 권하는 사회'이자, '범죄 권하는 사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범죄 권하는 사회일까?

정말 그럴까. 문득 궁금해졌다. 생로병사야 인간 생의 숙명이니 아픈 사람 좀 많다고 '질병 권하는 사회'라 하는 건 비약이 있지만, 자유의지를 지닌 (혹은 지녔다고 생각되는) 구성원들 중 범죄자가 유독 많다면 '범죄 권하는 사회'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단순히 감옥에 갇혀 있거나, 디지털교도소에 신상이 모두 공개된 사람들만을 범죄자라곤 하지 않으니, 한 번이라도 죄를 지어본 적이 있고, 그것이 기록으로 남은 사람들, 그러니까 전과자들의 수를 살펴보면 어떨까. 2010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전과자 수는 1,100만 명. 당시 전체 인구의 22% 수준이며, 4.5명 당 한 명 꼴이다. 2020년이 되면 전과자 비율이 32%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까지 있다.

 

 

"행정규제 위반도 형사처벌…인구 22%가 전과자"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정주호 기자 = 규제위반에 대한 무분별한 형사처벌로 국내 전과자 수가 인구 4.5명중 1명꼴인 1천100만명에 달한다는 지적이...

www.yna.co.kr

 

과잉범죄화의 법경제학적 분석- 공정거래분야를 중심으로 - - 한국경제연구원

본 보고서에서는 한국에서 행정규제 위반행위에 대한 무분별한 형사처벌 입법이 존재하고, 이로써 규제범죄자를 양산하는 과잉범죄화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법경제학적 관점에

www.keri.org

 


2002년엔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있는데, 당시 전과자 비율이 국민 3분의 1에 육박하는 1,300만 명이었다는 것. 전과자가 너무 많아서 1년 후인 2003년에는 일정 기준을 만족하는 수백만 명의 전과 기록을 삭제하는 법을 개정 입법하기까지 했다. 수백만 명의 전과 기록을 삭제하고도 7년 후 다시 1,100만 명 수준이 된 것을 보면, 사실상 전과자 수나 비율은 크게 줄지 않은 셈이다.

 

 

국민 3명중 1명 전과자 가벼운 전과 삭제 방안[안형준]

 

imnews.imbc.com

 

기소유예.불기소등 경미한 범죄 대상, 428만명 전과기록 삭제

5년전에 처분된 기소유예나 불기소 등 경미한 범죄전과기록이 완전 삭제됐다. 경찰청은 6일 전과자 양산방지와 인권보호를 위해 개정된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됨에 따라 전체 전과기

www.mk.co.kr

 



기사 내용처럼 대한민국만 유독 과잉 규제로 전과자를 양산하는 것은 아닌가 했는데, 미국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5년, 전과 기록이 대학 학위만큼이나 흔하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났는데, 엄밀히 말해, 조회가 가능한 '체포 기록'이 그만큼 흔하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Just Facts: As Many Americans Have Criminal Records as College Diplomas

With as many criminal convictions as college degrees, it's more evident than ever why "ban the box" laws are important for the economy.

www.brennancenter.org

 


미국에서 '체포 기록'은 조회가 가능하고 승진 등에 불이익이 있는 등 실제로 전과 기록과 유사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2015년 7월 기준으로 체포 기록이 있는 사람이 7,000만 명 이상이며, 캐나다나 프랑스의 인구보다도 많고, 결혼 부부의 수나 반려견을 키우는 가정의 수보다도 많다는 등의 비교를 하고 있다.

미국 주요 인구 집단과 체포 기록 수의 비교 (출처: 위 기사)

 


2015년 전체 미국 인구가 3억 2천 7십만 명 정도로 검색되니, 당시 인구의 21.8%가 체포 기록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사에서는 전체 미국인 30%가 23세가 되기 전에 최소 한 번은 체포되는 꼴이라는 2012년 연구도 소개하고 있다.

청소년 및 청년의 누적 체포율 (출처: 위 기사)


마치 국가 기관이 국민의 전과자 비율을 30% ~ 20% 수준으로 유지하는 전략이라도 펼치고 있는 것 같다. 국가에 범죄자가 많아서 무슨 이득이 있는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죄인'이 된 국민이 통제하기 더 쉽다거나, '죄인'의 낙인이 없는 국민들의 공포심과 우월감이 푸코적 지식 권력으로 작동하거나 하는 것일까. 뭐, 국가 위정자가 아닌 나로서는 영영 알 길이 없겠다.

다만, 범법 행위를 하다가 '걸린' 전과자가 3분의 1 수준인 거라면, 사실 나머지 3분의 2에 해당하는 국민들도 '안 걸린' 것뿐이지, 사실 대부분 (어떤 의미에서든) 범법자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은 든다. 이쯤 되니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상상력이 꽤 현대적으로 느껴진다.



민감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의 일부 내용에 초점을 두다 보니, 저서 비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저자의 다양한 사회역학 사례 연구들을 다루지 못했다. 사실 김승섭 교수의 사례 연구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더 아픈' 취약계층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왜, 어떻게 더 아프며, 공동체에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이 사례 연구들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살펴보고, (다소 동화같이 들리는) 공동체적 연대에 대한 그의 비전을 통해, 김승섭이라는 흥미로운 학자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 것인지 조심스럽게 예측해보겠다.

 


김승섭은 누구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까

 

김승섭 교수, <아픔이 길이 되려면> #2 - 김승섭은 누구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까

김승섭 교수의 첫 저작,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정리하고 있다. 지난 포스트에서는 '재소자'에 대한 글을 중심으로, 사회역학자로서 김승섭 교수가 갖고 있는 '죄와 벌'에 대한 생각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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