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보르헤스

보르헤스 <알레프>, 인류의 '독일 레퀴엠'

mayiread 2022. 3. 21. 19:12

 

 

보르헤스의 대표 단편집 중 하나인, <알레프>의 수록 작품들을 읽고 정리하고 있다.

 

최낙원 교수님의 글을 빌어 보르헤스를 무턱대고 읽기 가장 쉬운 방법에 대해, 그리고 보르헤스가 그 깊은 이해심으로 불쌍히 여겨주었던 아베로에스와 아스테리온에 대해 다뤘다.

나치의 고문기술자, 린데

후기에서 보르헤스는 이 작품이 독일 나치즘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였다고 소개하고 있다(218p).

'독일 레퀴엠'은 나치 전범인 추어 린데가 털어놓는 독백과 보르헤스의 가짜 주석으로 구성된 단편이다. 린데는 집단 수용소의 부소장으로 있던 고문기술자로,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죽음을 고작 하루 앞두고 있다. 

 

나치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던 아이히만
추어 린데처럼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나치의 수송 담당자, 아돌프 아이히만 (출처: deutschlandfunk.de)

 

 

그런데 그런 린데가 독백을 시작하며 이런 고백을 한다.

<알레프>, 104p

나는 사면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받고 싶다.


잔혹한 나치의 고문기술자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이해받고 싶다'며 털어놓는 얘기, 당연히 진부한 변명이나 모순적인 괴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독일적이면서 보편적인, '독일 레퀴엠'

그런데 보르헤스는 이런 주변화된 개인적 서사에 '독일 레퀴엠'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독일 레퀴엠은 작중에도 등장하는 브람스가 작곡한 진혼곡이다. 성서를 인용하며 '죽음'을, 특히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인데, 라틴어 성서를 인용하던 당시 작곡계의 전통을 깨고 마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를 인용한 것이 특징이다.

 

 

브람스, 독일 레퀴엠

“가장 순수한 예술적 수단, 즉 영혼의 따스함과 깊이, 새롭고 위대한 관념, 그리고 가장 고귀한 본성과 순결로 일궈낸 최고의 작품이다. … 바흐의 [b단조 미사]와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제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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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독일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곡이 독일어로 쓰였으니 당연히 독일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에게나 와닿을 법한 죽음에 대한 정서를, 라틴어를 모르는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썼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다음은 독일 레퀴엠 <제3곡>의 일부이다.

독일 레퀴엠 op.45, <제3곡> 중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인생의 전성기조차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습니다. 걸어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평생이 실로 한오라기 그림자일 뿐,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입니다. 장차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언뜻 보면 우리 조상님 중 한 분이 썼다고 해도 믿을 법한 가사인데, 그래서인지 위에 인용한 황장원 선생님의 글에 따르면 브람스는 이 레퀴엠의 제목에 '독일의'라는 단어 대신 '인류의'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고 고백했었다고 한다.

 



나치의 정치, 인류의 정치

그렇다면 보르헤스 또한 이 타자화된 나치 전범의 개인적인 고백을 통해, 독일 나치즘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하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사용하는 보편적인 정치 언어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하고자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막 수용소의 부소장이 된 화자의 첫 희생양, '예루살렘'에 대한 보르헤스의 서술을 보자. 보르헤스는 조그마한 글씨의 주석을 통해서만 말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봐야 한다. 보르헤스는 예루살렘에게 가해진 잔혹한 정신 고문에 대한 서술을 삭제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레프>, 110p

'다비드 예루살렘'은 아마도 여러 개인들의 상징일 수 있다. 그는 1943년 3월 1일에 죽었으며, 화자는 1939년 3월 1일에 틸시트에서 부상당했다고 전해진다.


보르헤스는 예루살렘이 더 보편적인 희생양의 전형임을 지적한 뒤, 다소 흥미로운 사실을 짚어낸다. 예루살렘은 고문한 화자가 총상을 당한 날짜가 예루살렘이 자살에 '성공'한 날짜인 3월 1일과 같다는 것. 보르헤스는 화자를 수용소의 부소장이자 고문 기술자로서가 아니라 총상을 입은 전쟁상이군으로 그리며, 그 또한 예루살렘과 같은 전쟁의 희생양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르헤스는, 독일의 패전을 목도하면서도 기쁨을 맛보는 화자의 심리를 설명하며, 사실은 이 폭력의 역사가 나치의 역사일 뿐 아니라 전 인류의 역사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폭력의 역사가 승전국을 통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알레프>, 113p

수 세기를 지나고 수많은 지역을 거치면서 이름과 방언과 얼굴은 바뀌지만, 영원한 적대자들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국가들의 역사 또한 비밀스러운 연속임을 기록하고 있다... 히틀러는 '하나의' 국가를 위해 싸운다고 믿었지만, 그는 '모든' 국가, 심지어 그가 공격했고 증오했던 나라들을 위해 싸웠다 ... 우리는 유대주의에게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다. 그 칼은 우리를 죽이고 있고, 우리는 미로를 짜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 안에서 떠돌아다녀야 하는 마법사, 혹은 이방인을 심판하고 사형 판결을 내린 뒤에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계시를 듣는 다윗과 비교될 수 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수많은 것을 파괴해야만 한다...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둥근 원이며 완전하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알레프>, 113p

이제 무자비한 시대가 세상 위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시대를 만들었고, 이제 우리가 그런 시대의 희생자이다. 영국이 망치가 되고, 우리가 대장간의 모루가 된들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비굴한 기독교의 소심함이 아니라 폭력이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파우스트적 문화의 무한한 정복욕, 패권 국가들이 보이는 힘에의 의지, 효율적인 능력주의 및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동정심에 대한 경계는, 사실 나치즘만의, 독일 제국만의 것이 아니다.

미국 패권을 중심으로 한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안정적인 부와 기득권을 쥔 기성 세대에게서, 무엇보다도, 살아남기 위해 싸우듯 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서 매일 같이 발견하는 특징이 아닌가.


사실 보르헤스가 그리는 칼과 피의 순환 고리는, 단순히 나치즘의 비극적 운명을 보여주는 상징이 아니라, 무던히도 반복되어 온 숙명을 떠올리는 인류의 문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보르헤스가 린데를 언급한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마음산책, <보르헤스의 말>, 297~298p

코파
쇼펜하우어는 보르헤스 씨 같은 아주 훌륭한 사람과 당신 소설에 나오는 수용소 부소장인 오토 디트리히 주르린데 같은 대단히 역겨운 사람, 두 부류 모두에게서 하나의 본보기로 존경받고 수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걱정되지 않나요?...


보르헤스
신경 쓰이지 않아요. 우리가 쇼펜하우어를 존경한다면, 우리 둘 다 올바른 판단을 한 거예요.


보르헤스가 쇼펜하우어와 브람스, 그리고 셰익스피어에 전율하는 린데의 모습에서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봤다면(105p), 평범한 현대인들에게서 나치즘을 발견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 슈펭글러와 '파우스트적' 문화


앞서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의 문화가 '파우스트적'이라 했는데, 이는 린데의 독백에 등장하는 슈펭글러라는 학자의 분류이다. 린데는 독백 도중에, 슈펭글러가 자신의 삶에 들어왔으며,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슈펭글러 청산하기>라는 글을 쓰며 '파우스트적인' 특성의 예시를 다시 찾았다고 하고 있다(105p).

여기서 인용되는 슈펭글러는 2권으로 이루어진 <서구의 몰락>의 저자, 오스발트 슈펭글러로, 문명이 일종의 생애주기를 거쳐 몰락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은 1권이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서구의 몰락 - YES24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시대 및 역사를 직관하는 힘이 돋보이는 역사철학서이자 문명비판서로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당시, 시대의 징후를 예민하게

www.yes24.com

 

 

보르헤스는 역시나 엄청난 독서광 답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2권에 담긴 '문명유형론'을 인용하는데, 인류 문명을 다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슈펭글러의 이론이다.

아폴론적 문명
고대 그리스 및 로마 문명
역사에 무관심(ahistorical)
지금, 여기의 순간과 육체의 아름다움에 집중

마기적 문명
유대, 초기 기독교, 이슬람 문명
동굴이나 돔과 같은 닫힌 세계관
본질에 대한 집착

파우스트적 문명
현대 서양 문명
끝없는 심연의 공간을 지닌 세계에 대한 인식
무한과 궁극의 지식에 대한 갈망

 

The Decline of the West - Wikipedia

Book by Oswald Spengler The Decline of the West Cover of Volume II, first edition, 1922AuthorOswald SpenglerOriginal titleDer Untergang des AbendlandesTranslatorCharles Francis AtkinsonCountryGermanyLanguageGermanSubjectPhilosophy of historyPublication da

en.wikipedia.org


슈펭글러는 현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파우스트적 문명이 마기적 문명에 대한 반발로 생겼다고 보았는데, 모스크의 돔과 같이 닫힌 마기적 세계관과, 현대 우주론의 무한한 공간으로 대표되는 파우스트적 세계관을 대조한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돔 형태의 닫힌 &#39;마기적&#39; 우주관 (출처: Schadewald&#44; B. (2015)&#44; The Plane Truth)
돔 형태의 닫힌 '마기적' 우주관 (출처: Schadewald, B. (2015), The Plane Truth)
무한한 &#39;파우스트적&#39; 우주관 (출처: Cernokulski&#44; I. (2018). The Infinite Universe)
무한한 '파우스트적' 우주관 (출처: Cernokulski, I. (2018). The Infinite Universe)

 

 

보다시피 이 파우스트적 문화의 세계관은 사실 '독일적'이라기보다 현대적이다. 보르헤스는 이를 인식했는지, 린데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레프>, 105p

나는 슈펭글러가 '파우스트적'이라고 지칭한 특징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기념비는 괴테의 각종 희곡 작품이 아니라, 20세기 전에 쓰인 「사물들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시라고 지적했다.


<사물들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시는 원자론을 주장한 고대 로마의 자연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시인데, 린데는 이 자연철학자가 <파우스트>의 저자인 괴테보다도 더 '파우스트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물질적 세계관을 통해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것인데, 그 목차만 봐도 현대 물리학과 겹쳐지는 착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 YES24

기원전 1세기에 쓰인 이 책은 플라톤학파,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스토아학파와 더불어 헬레니즘 시기의 중요한 철학사조인 바로 에피쿠로스학파의 물리학, 우주론, 윤리학을 전해주는 대표적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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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론의 기본원리
아무것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음(146-214)
아무것도 무로 돌아가지 않음(215-264)
원자와 공간만이 궁극적인 것임 (418-448)
다른 모든 것은 원자와 공간의 성질이거나 사건임 (449-482)
원자가 존재함: 논증의 도입 (483-502)
원자들은 견고하고 영원하며 단순함(503-550)
원자는 나눠지지 않음(551-583)
원자에는 부분이 있으며, 이것이 연장(延長)의 최소 단위임 (599-634)

우주의 무한함
공간과 물질과 우주의 무한함(951-1051)
우주에 중심이 있다는 이론에 대한 반박(1052-1113)


결국, 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 보르헤스는, 무한한 시공간에 대한 자연과학적 인식을 '파우스트적'이라고 부르는 린데를 통해, 슈펭글러를 '청산한' 나치 당원의 세계관이 결국 현대 서양 문명의 세계관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했었던 듯하다.



지금까지 알레프 수록 17개 단펀 중 3개를 읽고 정리해봤다. 나머지 단편은 보르헤스의, 그리고 이 블로그의 독자층이 조금 더 쌓이고 난 후에 정리해보고자 한다. 독서모임에 가기 전이나 리스폰스 페이퍼를 쓰기 전에 읽어볼 만한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생각해보니 보르헤스를 읽는 수준의 독서모임이나 수업이라면, 내 글보다 훨씬 더 성실한 독해를 이미 하고 있지 않겠나 싶다.

 


이번 포스트에서 정리해 본 나치즘에 대한 보르헤스의 생각은, 실제 나치 전범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속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악의 '평범성'은 악이 편재해 있다는 의미에서의 '평범성'이 아니라, 그 어떤 가공할만한 무시무시함도 없는, 그저 무능하고 비웃을만한 악이라는 의미에서의 '평범성'이다. 미디어에선 '찌질함'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나치로부터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배운 유대주의 전선의 대표 기자, 한나 아렌트가 어떻게 나치를, 그리고 아이히만을 (장황하고 거만한 글로) 도덕적으로 난도질하는지, 불구경 삼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 -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

앞으로 여러 개의 포스트를 연재하며 한나 아렌트의 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첫 포스트의 목적은 하나다. 당신이 을 읽지 않게 하는 것.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내

mayirea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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