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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 2020년 26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mayiread 2022. 5. 17. 21:29

 

 

국내 어린이문학상 공모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 1992년 시작된 비룡소의 <황금도깨비상>인데, 2020년 26회 <황금도깨비상> 공모의 그림책 부문 수상작인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가 2020년 11월 초에 출간되었다.

 

이 그림책은 '루리'라는 이름의 동화 작가의 첫 작품인데, 루리 작가는 국내 어린이문학상 공모전 중 최대 규모인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까지도 같은 해에 동시에 거머쥐며 굉장히 이례적인 등단을 했다. 후자의 상을 받은 작품이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다름 아닌 <긴긴밤>이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 링크 참조)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 YES24

그러니까··· 당신들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할 일이 없어졌다는 거예요?2020년 제26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제26회 황금도깨비상을 수상한 루리 작가의 첫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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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 <긴긴밤> - 2020년 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긴긴밤>은 국내 어린이문학상 공모 중에서는 최대 규모인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에서 2020년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년에 1만 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 대접을 받는 한국 출판계에서 한 달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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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그림(Grimm) 형제의 동화 중 <브레멘 음악대>를 모티브로 삼아 이를 굉장히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인데, ​표지부터가 굉장히 신선하다.

 

보통의 '브레멘 음악대' 동화들이 네 동물들을 딴따라 밴드 정도로 그리던 것에 반해, 표지 속의 네 동물들은 먼 곳 어딘가에 있을 '브레멘'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네 동물의 아련한 뒷모습을 바라본 뒤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표지. (출처: 산그림)

 

표지를 넘기자마자 루리 작가가 말을 걸어온다.

 

루리,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 작가의 말

진심을 담아,
브레멘에 가지 못한 나와 내 친구들로부터.

 

그렇다. 이 동화는 브레멘에 가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비룡소는 자신들이 지닌 가장 오래된 문학상을 수상했다. 루리 작가의 첫 작품이 흥미로운 건 바로 이 지점이다. 브레멘 밖을 떠도는 이들의 이야기국내 최고(最古)의 어린이문학상을 받았다는 것. 

 

 


'어린이'문학상을 받은 '어른' 동화

루리 작가의 첫 작품인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가 황금도깨비상을 받은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인데, 이 작품이 기존 다른 황금도깨비상 수상작들과는 다소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수상작들은 '아동 문학'이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 주요 인물을 모두 어린이로 설정한다거나, 어린이들에게 친숙하리라 생각되는 동물이나 주변 사물들을 주요 소재로 활용한다.

 

그런데 루리 작가의 신작에는 어린이가 등장하지도 않고,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소재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루리 작가는 직장, 일터, 알바, 장사할 터를 잃은, 누가 봐도 어른일 수밖에 없는, '버려진'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택시 운전사 당나귀 씨, 식당 직원 바둑이 씨,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야옹이 씨, 지하철 노점 상인 꼬꼬댁 씨가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의 네 주인공 (출처: 그림책 박물관)


루리 작가는 이 네 등장인물이 일터를 잃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는 더 나아가 네 명의 '도둑들'마저 주인공으로 삼는다. 네 동물들이 도둑들을 쫓아내는 원작과는 다르게, 작가는 도둑들도 동물들과 함께 일터를 잃고 "그럼 우리는 이제 뭐하지?"라고 물으며 고민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직장(?)을 잃은 네 명의 도둑들 (출처: 비룡소)

 

그림의 스타일이나 컷의 구성, 배치도 일반적인 '어린이 그림책'의 추상성과 단순함을 벗어나 영화 콘티를 연상케 하는 사실성과 짜임새를 보여준다. 황금도깨비상을 수여한 심사위원도 "적절한 화면 분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연계성이 뛰어난 작품"이라 평했다.

 

일터를 잃고 남겨지는 네 동물들 (상단) & 지하철에 타는 네 동물들 (하단) (출처: 비룡소 & 직접 촬영)


​그 소재와 내용은 말할 것도 없다. 생계를 잃은 동물들과 도둑들이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네'라는 깨달음을 공유하며, "그럼 우리는 이제 뭐하지?"라고 묻는 것이 주요 줄거리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살걸 그랬네"라고 후회하는 도둑들이 일터를 잃은 네 마리 동물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열심히 살아도 소용없네."라고 깨닫는데, 이처럼 작품이 제기하는 주요 문제는,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언급했듯, 사실 '어른들의 문제'인 것이다.

동물들과 만나는 네 도둑들 (출처: 비룡소)


이처럼 별다른 교육적·교훈적 목적도 없이, 담백하고 짜임새 있는 그림 서사 하나로 '어른들'의 문제로 곧장 다가서는 이 작품에 '어린이'문학상의 대표 격인 <황금도깨비상>이 돌아갔다. 어떻게? 무엇보다, 왜?​


그림(Grimm) 형제의 <브레멘 음악대>​

위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해보기 위해, 이 작품의 모티브인, 그림 형제의 <브레멘 음악대>를 잠깐 살펴봤다.

​<브레멘 음악대>는 그림 형제의 동화집 1권에 수록된 27번째 작품으로, 자신의 주인에게 버려진 네 마리 동물들이 우연히 만나, 다 함께 브레멘에서 '음악대'를 결성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독일어로는 Stadtmusikanten, 영어 번역어로는 Town musicians이니, '서울시 동물 4중주단' 정도를 꿈꿨달까. 아, 왜 버려졌냐고? 당나귀는 늙고 일을 못해서, 개는 사냥을 못해서,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해서, 닭은 맛있어서(...) 주인의 손에 죽을 뻔했다가 도망친 것이다.

<브레멘 음악대> 이야기에 기반한 일러스트들. (위 포함 이후 출처: Slap Happy Larry)



재미있는 건, 사실 <브레멘 음악대> 이야기에는 브레멘도, 음악대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 마리 동물은 브레멘으로 가던 중 도둑들의 소굴을 찾게 되는데, 함께 훔친 금화를 나누던 이 도둑들을 울음소리를 이용해 영리하게 쫓아내고는 자기들이 그 금화와 소굴을 차지해 행복하게 산다. 결국 네 마리의 버려진 동물들이, 브레멘에 이르거나 음악대가 되지 않고도 행복을 찾는 이야기가 원작의 서사인 것이다.

자신들의 울음소리로 도둑들을 내쫓은 네 동물들

 


보편적인 '브레멘 밖' 이야기

그림 형제의 <브레멘 음악대> 이야기는 수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어주었다. 다양한 애니메이션과 뮤지컬은 물론이고, 문학, 음악, 게임에까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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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토록 영감을 주는 서사적 에너지는 권선징악과 자본주의를 섞어 놓은 듯한 그 결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동물들이 꿈의 영역인 '브레멘 밖'에서 대안적 행복을 찾는다는 서사 구조 자체에 있는 것 같다.

 

'제주도 브레멘 음악대' 관련 기사가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인데,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직장을 그만둔 조상민 씨가, 주인이 잡아먹으려던 당나귀와 유기견들, 길냥이를 모아 함께 데리고 산책을 하는 모습이 많은 이들의 호감과 관심을 샀었다.

 

 

‘제주 명물’로 떠올라 귀엽다고 난리난 ‘당나귀+냥+댕댕’ 조합

제주를 찾은 이들이 구좌읍 월정리에서 자주 발견되는 신기한 조합의 동물들에 재밌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www.insight.co.kr

 

제주도의 브레멘 음악대 산책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세계일보)


루리 작가의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는 초지일관으로 이 '브레멘 밖'의 이야기를 강조한다. 어딘지 모를 먼 곳의 '브레멘'을 바라보는 것 같은 네 동물들의 표지 속 뒷모습. '브레멘에 가지 못한' 작가가 남긴 편지와도 같은 서문. 그리고 버려진 동물들과 도둑들이 우여곡절 끝에 어느새 '브레멘 밖에서' 모두 함께 하게 되는 이야기까지.

 

어떤 사연인지 여덞 명(혹은 마리)이 함께 브레멘 밖을 뛰놀고 있다. (출처: 직접 촬영)



동화는 항상 Fairy Tale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어린이 문학(Children's literature)'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분명 동화적이다. 어리고 유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부모님들이 들려주는 'Fairy Tale'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브레멘 음악대>를 포함한 그림 형제의 동화들도, 구전 민담의 형태로 전해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력이 만든 작품이었다. 언어학자였던 그림 형제는 '독일의 문화적 유산'을 남기려는 목적에서 독일 각지의 방언 자료를 수집하면서 해당 지역의 민담과 설화(legends) 또한 같이 겸사겸사 모아서 엮어내었는데, 여기에 출판사가 '어린이 문학'이라는 컨셉을 슬쩍 끼워 넣어 판매한 것이다.

언어학자였던 그림 형제 (출처: 위키피디아)

 

<Kinder- und Hausmärchen(Children's and Household Tales)>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림 형제 동화 (출처: 위키피디아)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가 고리타분한 교훈이나 메시지 없이도 훌륭한 '동화'일 수 있다면, 그건 루리 작가의 '브레멘 밖' 이야기가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의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네 동물들은 모두 '꿈고개로'라는 이름의 달동네에 살고 그렇기에 목적지도 같지만, 서로를 알지 못하기에 '각자' '따로따로' 움직인다. 그러다 "열심히 했는데도 할 일이 없어졌다"라는 고백을 기점으로 함께 모이기 시작한다. '브레멘 밖'에서 말이다.

 

난쏘공의 '낙원구 행복동'을 떠올리는 '꿈고개로'. 보광동 일대가 모델이다. (출처: 직접 촬영)

 
그러면 독자들도 자연스레 '브레멘 밖'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가 '따로따로'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할 일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열심히' 하려는 어른스러움을 잠시 내려놓고, 이 동물들과 도둑들처럼 '동화 같은 순수함으로' 같이 어울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잠시라도 행복하게 삶을 이겨낼 수 있지는 않을까?


루리 작가의 이야기가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동화적인 질문들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리고 그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동화 같은 성격의 캐릭터들(당나귀 씨, 바둑이 씨, 야옹이 씨, 그리고 꼬꼬댁 씨와 네 도둑들)을 상상하게 한다면, 사실 Fairy Tale로서의 동화가 해야 하는 일을 정말 훌륭히, 다 해낸 것이 아닐까.

 

 

루리 작가는 최근 <메피스토>라는 이름의 120여 페이지나 되는 장편 그림책을 냈다. 그녀는 처음으로 <메피스토>에서 꽤나 긴 작가의 말을 썼는데, 이 이야기를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한 동화'라고 소개했다. 그녀가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해 어떤 Fairy Tale을 들려줘야만 했을지, 아래 포스트에서 살펴보겠다.

 

 

루리 <메피스토> -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한 동화

과 로 등단한 동화 작가 루리가 지난 4월 28일 신작 그림책을 냈다. 이다. 이 '21년 12월에 출간되었으니, 거의 1년 반만의 신작이다. ('22년 1월에 출간된 에도 그림을 그리긴 했으나, 직접 글을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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