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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 <메피스토> -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한 동화

mayiread 2023. 5. 11. 21:55
 

 

<긴긴밤>과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로 등단한 동화 작가 루리가 지난 4월 28일 신작 그림책을 냈다. <메피스토>이다. <긴긴밤>이 '21년 12월에 출간되었으니, 거의 1년 반만의 신작이다. ('22년 1월에 출간된 <도시악어>에도 그림을 그리긴 했으나, 직접 글을 쓴 작품은 아니어서 그녀의 작품으로 보진 않았다.)
 

 

메피스토 - YES24

『긴긴밤』,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의 감동을 잇는 루리 작가 신작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로 비룡소 황금도깨비상 그림책 부문 대상, 『긴긴밤』으로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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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와 <긴긴밤>. <메피스토>가 거의 2배 가까이 더 두껍다.

 
루리 작가는 지난 1년 반 동안 별로 쉬질 않은 것 같다. <메피스토>는 무려 120 페이지나 되는 장편 그림책이다. 그래픽 노블이 아닌 이상 100 페이지가 넘는 그림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작가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듯하다. 과연 무슨 이야기였을까.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한 동화

<메피스토>에서 루리 작가는 처음으로 꽤 긴 '작가의 말'을 남겼는데, 꽤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메피스토>, 작가의 말

... 이 이야기는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한 동화입니다.

 

이 문장은 루리 작가의 다른 문장을 떠오르게 한다. 바로 <긴긴밤>을 시작하는 문장들이다. 
 

루리, <긴긴밤>, 시작하는 말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긴긴밤 - YES24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긴긴밤』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와 코뿔소 품에서 태어난 어린 펭귄.그땐 기적인 줄 몰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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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에서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루리 작가가 이번 <메피스토>에서는 '어머니가 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문에 <메피스토>를 <긴긴밤>과 함께 읽는 일은 곧 루리 작가가 '부모됨'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 되겠다.  그녀는 독자를 울리고 웃기며 누군가를 '아버지'로 만들어주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엄마'로 만들어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들려준다.
 

<긴긴밤>(좌측)과 <메피스토>(우측)의 익스트림 클로즈 업 샷. 루리 작가는 그림책에 영화의 문법을 가져온다.

 
 
 

'말이 없는' 소녀의 이야기

<긴긴밤>과 <메피스토>는 '부성'과 '모성'이라는 주제뿐 아니라, 다른 여러 면에서도 대비되는 작품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작품의 형식이다. 아버지됨에 대해 이야기하는 <긴긴밤>은 ''동화이고, 엄마됨에 대해 이야기하는 <메피스토>는 '그림'책이다.
 
이런 형식적 차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듯 하다. <긴긴밤>의 아버지상인 '노든'은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전하는 존재이다. 그는 구전의 형식으로 자신이 경험한 삶의 기술과 지혜들을 아기 펭귄인 '나'에게 전수한다. <긴긴밤>은 구전의 기술을 소유한 아버지들의 이야기이다. 

 

<긴긴밤>, 116p

"나를 혼자 보내지 말아요."
"이리 와. 안아 줄게.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오늘 밤은 길거든. 네 아빠들의 이야기를 해 줄게.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줘."

이야기를 전하는 <긴긴밤>의 아버지들 (출처: 문학동네)

 
그런데 <메피스토>의 어머니상은 '말이 없는 소녀'이다. 그녀는 작품에서 청각 장애를 지닌 아이로 묘사되고, 의사소통을 문자와 제스처 등 비-언어적인 수단에 의존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최대한 그림으로 서사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어른과 아이 고민 다를게 있나요”…동화책 ‘메피스토’ 펴낸 루리 작가 인터뷰

“처음으로 내 편이 생겼어.” 어느 날 떠돌이 개 ‘메피스토’는 소녀와 친구가 된다. 본래 악마였으나 인간 세계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메피스토에게, 청각 장애로 소리가 들리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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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의 두 주인공, 말 없는 소녀와 메피스토. (출처: 동아일보)

 
 
그렇다면 루리 작가가 굳이 더 어려운 길을 택하면서 이 '말'을 빼앗긴 소녀를 통해 그리고 싶었던 그 엄마됨이란 어떤 것일까? 
 
 
 

아버지'들'의 유산

잠시만 <긴긴밤>으로 다시 돌아오자. 심사평을 쓴 송수연 평론가는 <긴긴밤>의 이야기 '로드무비'라고 정의한다(140p). 그것은 <긴긴밤>이 분명한 목적지를 갖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기 펭귄 '나'는 이야기를 전하는 여러 아버지들과 함께 '바다'를 향한 여정을 떠난다.
 
그런데 '나'는 이야기 속의 모든 아버지들과 이별한다. 노든이 '수단'을 모델로 삼았음을 감안하면,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다. <긴긴밤>의 모든 아버지들은 죽는다. 그들이 목숨을 다해 '나'에게 남긴 것은 결국 두 가지이다. 그들은 '나'를 바다에 보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유산으로 남겼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좌측)은 북부흰코뿔소 '수단'(우측)을 모델로 하고 있다. (출처: 문학동네 & YTN)

 
아버지들의 목적은 아주 분명하고 단순하다. '나'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바다'는 아기 펭귄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고, 아버지들의 이야기는 생명이 알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형태의 삶의 기술이다. 그렇다면 <긴긴밤>의 이야기는 오직 '나'의 생명을 위해 목숨이 다하도록 유산을 남기는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노든은 '나'를 '바다'로 인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출처: 문학동네)

 

 

'한' 엄마의 플래시포워드

그런데 <메피스토>의 '나'는 더 이상 연약한 아기 펭귄이 아니다. 그는 마법의 힘을 지닌 불멸의 악마다. 그렇다면 '나'는 생존을 위해 아무런 보호도, 유산도 필요로 하지 않다. 그에게 필요한 건 '구원'이다. <메피스토>라는 이야기의 목적은 악마 메피스토를 구원하는 것이다.

 

<파우스트>에서 끝내 구원받지 못한 유일한 존재, 메피스토. (출처: 비룡소)


악마 메피스토를 구원하기 위해 루리 작가는 새로운 모성을 상상한다.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영원히 여성적인' 존재는 메피스토를 제외한 모두를 구원한다. 루리 작가가 <메피스토>에서 그리는 모성은 그 정반대이다. <메피스토>가 그리는 모성모두에게 버림 받은 악마 단 하나만을 구원하는 모성이다.

 

<메피스토>, 작가의 말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노라.'라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문장처럼, 그렇게 엄마는 과거를 다시 써서라도 악마가 되어 버린 자식을 건져 올립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엄마가 되는 일에 대한 동화입니다.

 

괴테,  <파우스트>, 열린책들, 536~537p

모든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에 지나지 않느니라.
그 부족함이
여기에서 완전해지리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
우리를 이끌어 올리노라.

 

이 모성은 메피스토를 구원하기 위해 목숨이 아닌 다른 것을 희생하는데, 바로 자신의 기억이다. '말'을 빼앗긴 소녀는 기억과 망각, 현실과 망상을 넘나들며 자신의 기억을 버리고 메피스토를 구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시 쓴다. 이는 이 소녀에게 메피스토가 구원받는 어떤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다.

 

소녀는 과연 어떤 미래를 보았을까. (출처: 동아일보)

 

그리고 소녀는 여기서부터 입을 다문다

 

소녀는 자신이 본 미래도, 그 미래를 위해 직접 지운 기억들도,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쓴 이야기도, 그 누구에게 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내밀한 형태의 이야기이며, 오로지 이 소녀만의, 이 엄마만의 이야기이다. <메피스토>에서는 <긴긴밤>에서 가능했던 '아버지들'의 복수성이 불가능하다. <메피스토>는 오직 이 '한 명의' 엄마가 지닌 내밀한 이야기를 찾아가는 탐색기이다.

 

머그컵 굿즈에 인쇄된 메피스토. 소녀가 구겨둔 기억의 조각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출처: 알라딘)

 

그렇다면 루리 작가가 그리는 '엄마가 되는 일'은 가장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일반화될 수 없다. <메피스토>가 그리는 '한 엄마'의 이야기처럼, 모성의 이야기는 저마다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이다.

 

이 내밀한 이야기는 구전될 수 없다. 그래서 루리 작가는 이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그녀는 '그린다'. 이 이야기는 보고, 경험할 수는 있지만, 전할 수는 없다. 나 또한 <메피스토> 속 소녀의 이야기를 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보여지고 경험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다.

 

 

 

 

<긴긴밤>은 앞으로도 계속 회자될 것이다. 그것은 전해지도록 의도된 이야기이다.

 

<메피스토>는 전해질 수 없는 이야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장막이다. 한 모성의 이야기가 그 장막 뒤에서 독자들에게 경험되길 기다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회자될 수는 없지만, 다른 '부모됨'의 내밀한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메피스토>는 부모됨을 가장 잘 헤아리게 하는 동화가 될 것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한 부모가 <메피스토>를 읽고 있다 (출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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