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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인터뷰집, <헤밍웨이의 말> #4 - 헤밍웨이의 자살에 대해

mayiread 2022. 5. 11. 20:03

 

 

 

헤밍웨이의 진솔하고 수줍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터뷰집, <헤밍웨이의 말>을 읽어보고 있다. 몇몇 유명 단편에서 만날 수 있는 유난히 생략 많고 불친절한 문체 때문에 여러 대중매체에서 묘사하는 헤밍웨이의 마초적인 이미지가 선입견으로 박혀 있었다면, <헤밍웨이의 말>에서 부끄럼 많고 스스로에게 엄격한 은둔자 헤밍웨이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신선한 즐거움이 되겠다. '진실된 글'과 '문체'에 대한 헤밍웨이의 생각을 들어본 저번 포스팅에 이어, 그의 자살에 대해서도 짧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헤밍웨이의 말> #1 - 마초 셀레브러티를 넘어서
<헤밍웨이의 말> #2 - 헤밍웨이에게 '진실된 글'이란?
<헤밍웨이의 말> #3 - 헤밍웨이에게 '문체'란? (이전 포스트) 
<헤밍웨이의 말> #4 - 헤밍웨이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이번 포스트)

 

#1 마초 셀레브러티를 넘어서

 

헤밍웨이 인터뷰집, <헤밍웨이의 말> #1 - 마초 셀러브러티를 넘어서

헤밍웨이에 대해 알려진 사실들을 떠올려보면, 대학 교과서나 마케팅 전단에서 본 것들이 대부분이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 수상. 칵테일 다이키리를 즐겨 마심. 간결하고 생략이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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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헤밍웨이에게 '진실된 글'이란?

 

헤밍웨이 인터뷰집, <헤밍웨이의 말> #2 - 헤밍웨이에게 '진실된 글'이란?

지난 포스트에 이어, 헤밍웨이의 인터뷰집 <헤밍웨이의 말>을 정리해보고 있다. 책을 번역하신 권진아 선생님의 서문 대로, '마초 셀러브러티' 뒤에 숨겨진 백전노장 작가로서의 헤밍웨이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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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헤밍웨이에게 '문체'란?

 

헤밍웨이 인터뷰집, <헤밍웨이의 말> #3 - 헤밍웨이에게 '문체'란?

헤밍웨이의 인터뷰집 <헤밍웨이의 말>을 통해 '마초 셀러브러티' 이미지에 가려진, 백전노장 작가로서의 헤밍웨이의 모습을 살펴보려 하고 있다. '진실된 글'에 대한 헤밍웨이의 생각을 다루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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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자살 심리부검

헤밍웨이는 61세에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헤밍웨이는 인터뷰집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더 얘기해준다. 헤밍웨이의 아버지 또한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

<헤밍웨이의 말>, 95p

"있잖습니까," 그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총으로 자살했어요." 침묵이 흘렀다. 헤밍웨이가 아버지의 자살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물었다. 헤밍웨이는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모든 사람의 권리지만, 거기에는 약간의 이기주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경시가 담겨 있어요."

 

헤밍웨이의 가족 사진 속 Clarence Hemingway (왼쪽에서 세 번째). 헤밍웨이의 아버지로, 권총 자살했다. 참고로 헤밍웨이는 오른쪽 끝에 있는 소년 (출처: 위키피디아)

 

 

특히 정신의학계에 있는 분들이 여기에 흥미를 많이 느끼시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대문호라고 추켜세우는 유명 작가의 정신 건강을 분석하고 부검하는 일이니 오죽할까. 몇 가지만 대표적으로 인용해봤다.

 

 

대전 MBC 방영 - 헤밍웨이의 조울증 

 

 

정신의학신문 연재 기사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자살 심리부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자살 심리부검 #1 - 정신의학신문

[정신의학신문 : 권용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 - 인물 - 문학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07.21 - 1961.07.02)미국 출생의 작가 "나는 처음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www.psychiatricnews.net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자살 심리부검 #2 - 정신의학신문

[정신의학신문 : 권용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헤밍웨이의 자살에 대한 정신의학적 접근을 다루는 두 번째 글입니다.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자살 심리부검 #1 양극성장애헤밍웨이는 종종 현재

www.psychiatricnews.net

 

 

요약하자면 평생 조울증과 알코올 중독으로 시름하던 그의 정신이 마침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FBI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피해 망상'에 시달리며 여러번 자살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을 근거로 삼아, 헤밍웨이를 우울증 환자로 진단한다. 일단 헤밍웨이를 정신병자로 보기 시작했으니 추가적인 진단도 쉽다. 사파리 사냥, 낚시, 투우, 권투와 같이 '죽음에 가까운' 위험한 스포츠를 즐긴 헤밍웨이의 인생 전체를 '조증'의 발현으로 보는 것이다.

 

분명, 유명 작가로서 성공적이고 규율에 충실한 삶을 살던 그가 갑자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설명에는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쉬운 쪽은 이 (잘못된) 설명과 함께 정신과 의사들의 진단을 믿는 일이겠다. 어쨌든 헤밍웨이는 죽었고, 이런 진단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정신과 의사들이 '심리 부검'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성격과 인생을 신나게 난도질한다고 해도, 뭐 어쩌겠는가.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그렇게 쉽게 설명하는 데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서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는 주장을 해보고 싶다. 정신과의사들이 약하고, 병들고, 죽은 이들에게 잘못된 낙인을 찍고 그들의 몸과 뇌를 잔인하게 난도질한다는 건 적어도 헤밍웨이의 사례에 있어서만큼은 사실이라고.​


 

헤밍웨이의 '피해 망상'에 대한 변론

우울감이나 의심을 불러일으킬 이렇다 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음에도 만성적인 우울감과 의심이 계속된다면 '우울증', '망상'과 같은 진단을 내려도 뭐라 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를 정신과의사가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 적어도 헤밍웨이의 경우에는 정신과의사들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의심과 우울감 모두에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의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구체적으로, FBI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의심. 위에서 '자살 심리부검'을 시행했던 권용석 의사는 이를 '피해 망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의심은 사실 전혀 '피해 망상'이 아니었다. 권 의사가 2017년 11월 기고글을 통해 헤밍웨이의 의심을 '피해 망상'이라고 난도질하기 30년도 전에, FBI가 헤밍웨이의 전화와 서신을 감청하고 감시했음이 기밀 문서 공개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1983년 3월의 일이다.

 

FBI가 공개한 헤밍웨이 문건의 일부 (출처: FBI)

 

 

122페이지에 달하는 이 문건에는 헤밍웨이가 아마추어 스파이로 활동했었다는 놀라운 내용도 담겨 있지만, 무엇보다도 헤밍웨이의 사적인 대화 내용에 대해 보고하는 '기밀 정보원(confidential informant)'에 대한 언급도 담겨 있다. 이런 감시는 194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니, FBI는 헤밍웨이가 자살할 때까지 20년에 걸쳐 헤밍웨이를 감시한 것. 이 감시가 얼마나 철저했던지, 헤밍웨이가 George Sevier라는 가명을 사용해 Mayo Clinic이라는 정신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위 문건의 전문은 아래 FBI 웹사이트에서 PDF로 다운받을 수 있다.

 

Ernest Hemingway

Ernest Hemingway (1899-1961) was a noted American author and journalist. This release consists of one FBI main file on Hemingway with documents ranging from 1942 to 1974. The bulk of it concerns Hemingway’s intelligence work on behalf of the U.S. Embassy

vault.fbi.gov

 

 

 

헤밍웨이의 '우울증'에 대한 변론

헤밍웨이의 우울감에도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팠다.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는 정말 불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비행기 연쇄 사고로 장기적인 뇌 기능 장애를 얻었다. 당연히 헤밍웨이의 작가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헤밍웨이가 겪은 비행기 사고 현장(위)과 헤밍웨이 부부가 사고사했다는 오보(아래) (출처: Medium, Messy Nessy)

 

 

헤밍웨이는 1954년 네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였던 메리 웰시(Mary Welsh)와 떠난 아프리카 여행 중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겪는데, 이들을 구조하러 온 후속 비행기마저 이륙 중 화재에 휩싸이면서 큰 부상을 입게 된다. 다행히 두 사람은 목숨을 건졌는데, 병상에서 자신들이 사고사했다는 오보를 흥미롭게 읽었다고. 하지만 이런 그의 유쾌한 성격도 이 사고로 인해 입은 심각한 뇌 손상과 그 후유증으로 찾아온 장기적인 뇌 기능 장애를 막아주지 못했다.

 

이런 사고 후유증을 더 심각하게 한 건 정신과의사들이었다. 헤밍웨이는 위에도 소개된 Mayo Clinic에서 당시 '전기 충격 치료(electro-shock therapy)'라고 알려져 있던 시술을 받았는데, 당연히 전기 고문 같은 비인도적인 치료는 아니었지만 오늘날까지도 기억 손상과 기억력 감퇴가 부작용으로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해 치료 잘못받으면 치매 환자가 되어버린다는 것. 실제로 헤밍웨이는 자신의 기억이 망가져가며 더 이상 작가 생활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가장 큰 괴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Hemingway's Brain - YES24

An innovative biography and the first forensic psychiatric examination of author Ernest Hemingway. Andrew Farah, a forensic psychiatrist, has con...

www.yes24.com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전기경련요법(ECT)은 오늘날에도 조울증과 조현병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신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홍보되고 있다.

 

헤밍웨이 우울증 치료하던 전기경련요법 현재는...

[6] 전기요법, 오해와 진실 그 70년 역사70년 ...

scienceon.hani.co.kr

헤밍웨이의 오랜 친구이자 자서전 작가이기도 했던 Aaron Edward Hotchner 또한, 헤밍웨이를 죽기까지 괴롭혔던 두 가지 난관(ordeal)으로 작가로서의 삶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좌절감과 FBI에 대한 두려움을 들었다. 이쯤되면 헤밍웨이의 생전과 사후에 있었던 정신병리적 진단들이 오진이며, 헤밍웨이에게 행해졌던 정신과적 치료 또한 그의 정신과 몸에 대한 난도질이었다는 생각은 강해져만 간다.

 

The Declassified FBI Files on Ernest Hemingway - The Vintage News

When Ernest Hemingway committed suicide in 1961, the world stood in awe. His talent and his adventurous spirit were admired by many, as he was seen as an

www.thevintagenews.com

 

헤밍웨이의 오랜 친구이자 자서전 작가였던 Aaron Edward Hotchner (출처: The Guardian)

 

 

 

 

헤밍웨이의 '진짜배기 고단함'

정신과의사들을 향한 이런 주관적-개인적 분노와 흥분은 잠시 잠재우고, 다시 <헤밍웨이의 말>로 돌아가보자.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작가로서의 삶이 '기껏해야 외로운 삶'이라 말한 헤밍웨이는 인터뷰집에서도 비슷한 논조의 말을 남긴다.

 

<헤밍웨이의 말>, 61p

생존하는 것, 명예―구식이지만 늘 중요한 그 단어―롭게 생존하는 것은 작가에게는 언제나 어렵고 늘 중요한 일입니다. 오래가지 못하는 작가들은 늘 더 사랑받아요. 그들이 죽기 전에 끝내야 한다고 믿는 뭔가를 이루기 위해 길고 지루하고 가차 없고 무자비한 싸움을 하는 걸 누구도 보지 못했으니까. 죽거나 일찍 쉽게 온갖 그럴듯한 이유로 그만두는 작가들은 이해할 만하고 인간적이니까 선호받죠. 실패와 잘 위장된 비겁함은 더 인간적이고 더 사랑스럽거든요.

 

그런데 이쯤되면, 헤밍웨이의 이 말은 작가로서의 삶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도 적용되는 말처럼 들린다. 우리는 굉장히 많은 경우 (꼭 '우울증'이나 '피해 망상'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참으로 길고 지루하고 가차 없고 무자비한 싸움의 연속을 살아내야 할 때가 많고, 그 싸움의 연속을 뚫고 명예롭게 살아남는 일이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참으로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헤밍웨이의 말>의 역자이신 권진아 선생님께서는 그래서인지 헤밍웨이의 말 속에서 '진짜배기 고단함'을 느낄 수 있음을 지적하신다.

 

그녀가 헤밍웨이 표 명언으로 가득 찬 유명 단편들이 아닌, 덜 알려진 단편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A Clean Well-Lighted Place>을 가장 좋아하는 단편으로 꼽으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자살 시도에 실패한 뒤로 밤늦게까지 밝은 카페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는 외로운 노인과 항상 카페의 마지막 손님인 그 노인을 내심 안타깝게 여기는 나이 든 카페 종업원의 이야기는, 허무함이 두려워 잠도 이루지 못하는 늙은이(들)의 모습을 통해 허무와 고독을 다루는 헤밍웨이의 방식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노인과 바다>, 열린책들, 241~242p.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공포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건 그가 너무나 잘 아는 허무였다. 모든 것이 허무였고 인간 또한 허무였다. 바로 그 때문에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또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 그는 바나 보데가를 싫어했다. 반면에 깨끗하고 불빛 환한 카페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생각에 잠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는 침대에 누워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마침내 잠이 들 것이다. 어쩌면 이건 불면증 때문인지도 몰라, 하고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로 고생을 하고 있지.

 


노벨문학상의 영예나 남성성 넘치는 덥수룩한 하얀 수염 뒤에서 자아도취와 무절제, 정신질환을 찾아내는 게 가십 메이커들의 일이었다면, 그 뒤에서 우리 모두가 아는 외로움과 '진짜배기 고단함'을 찾아내는 건 성숙한 문학연구가이자 번역가의 일이었으리라.

​덕분에 마음산책의 <헤밍웨이의 말>은, '마초 셀러브리티'의 이미지와 '자살한 정신병자' 가십 뒤에 묻힌 노작가의 가장 인간적인 강인함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제 값어치를 하는 책이 되었다. (포스팅을 작성 중인 2022년 5월 초엔 이미 <헤밍웨이의 말>은 종이책이 절판된 상태이지만, 여전히 전자책으로는 만나볼 수 있다.)

 

헤밍웨이의 말 - YES24

『헤밍웨이의 말』은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몇 달 전후인 1954년 5월과 12월의 인터뷰, 그리고 4년 뒤인 1958년의 두 인터뷰, 모두 네 편의 인터뷰를 모은 책으로 헤밍웨이의 마지막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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