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4 - 오퍼레이션 피날레

mayiread 2023. 5. 19. 21:02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보고 있다. 지난 포스트들에서는 웬만하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읽지 말라고 설득해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이 책을 읽고야 말리라 결심한 존경스러운 독자들에겐 꼭 '원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해보았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 -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

앞으로 여러 개의 포스트를 연재하며 한나 아렌트의 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첫 포스트의 목적은 하나다. 당신이 을 읽지 않게 하는 것.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내

mayiread.tistory.com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 - 당신에겐 '원서'가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의 에 대해 다루는 연재 포스트들을 쓰고 있다. 지난 포스트는 을 읽지 않도록 설득하는 글이었다. 이 책에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만의 논리 정연한 사유를 결코 찾을 수

mayiread.tistory.com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 - 원서가 필요한 순간들

앞선 두 개의 포스트를 통해 한나 아렌트의 을 읽지 않도록 끈덕지게 설득했지만, 당신은 이미 '원서'까지 사며 이 무지막지한 글을 읽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한나 아렌트 #1 - 이 책을 읽지 말

mayiread.tistory.com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독파하기 위해 꼭 필요한 두 번째 준비물 영화다.
 
앞선 포스트에서 이야기했듯, 아렌트는 당시의 여러 지정학적·역사적 배경들을 언급은 하면서도 자세히는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영상들을 미리 시청하면 아렌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이 한결 더 쉬워진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 포스트에서는 접근성이 좋은 순으로 3개의 영화만 소개해보겠다.
 

좌측부터 차례대로 <오퍼레이션 피날레>, <아이히만 쇼>, <한나 아렌트> (출처: 로튼 토마토)

 
 
 

아이히만 납치 작전, '오퍼레이션 피날레'

책의 제목을 다시 떠올려보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그런데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을리는 없다. 나치는 엄청난 잔혹 행위를 벌인 뒤 전쟁에서 패했다. 그러니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나 그 유족들에게 처형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최대한 먼 제3국으로 도망가 숨어 살았을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도 그랬다. 그는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독일을 탈출하여 떠돌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곳에 정착하여 한 공장의 감독관으로 일하며 가족들과 함께 숨어 살고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제 1,2 세계대전 때 모두 중립을 지켰던 아르헨티나의 수도였다.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에 있으니, 아이히만은 중립 지대를 찾기 위해 지구 반바퀴를 떠돈 셈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집(좌측)에 숨어 살고 있떤 아이히만의 모습(우측). 모사드가 첩보 중 촬영했다. (출처: Yad Vashem)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도대체 어떻게 아돌프 아이히만을 예루살렘의 재판에 세울 수 있었던 걸까?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가 이 질문에 대답해준다. 그들은 아이히만을 불법으로 납치했다.

 

납치 후 억류된 아이히만(좌측)과 그를 이스라엘로 송환하는 데 사용된 비행기(우측). (출처: Yad Vashem)

 


당시 이스라엘은 '모사드'라는 정보기관을 세운 뒤, 전 세계에 숨어 있는 나치 잔당들을 색출해 처단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처럼 전범 송환에 협조하지 않는 국가들에서는 불법 납치 작전도 펼쳤다. '오퍼레이션 피날레'는 아돌프 아이히만 납치 작전의 작전명이었다.
 

 

‘미국 대통령 암살도 모사드에겐 별문제 아니다’

[토요판] 뉴스분석 왜? 은근히 드러내는 암살공작 모사드의 심리전, 암살을 넘어 공포를 노린다 이란 핵과학자 암살이 핵개발 저지하리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 “이스라엘의 진짜 의도

www.hani.co.kr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는 같은 이름의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는 모사드가 숨어살던 아이히만의 집을 찾아낸 후, 그를 납치하고 억류해, 이스라엘로 송환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우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퍼레이션 피날레>의 포스터(좌측). 모사드 요원과 아이히만의 대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우측). (출처: 로튼 토마토 & New York Times)


<오퍼레이션 피날레>는 아이히만 재판 전까지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재판 당시의 맥락과 배경을 꽤나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스크린을 통해, '시온주의'의 성공 신화와 복수의 열기에 취해 아이히만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스라엘 국민들의 여론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시온주의'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를 참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속 시온주의 & 이스라엘 건국사

한나 아렌트의 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보고 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드디어 땅과 나라를 갖게 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며, 저서에서 여

mayiread.tistory.com


 

 

 

괴물화된 범인(凡人)

2,500년 만에 다시 나라를 갖게 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런 국민들의 여론을 아주 잘 활용할 줄 알았다.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불법으로 납치해온 것도 당시 수상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의 주문 때문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국민들과 전 세계에 보여줘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끝까지 복수한다'는 걸.

 

​​당시 이스라엘의 법무부 장관이었던 기드온 하우스너(Gideon Hausner)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직접 아이히만 재판의 검사장 역할을 맡아 '600만 희생자들을' 대표해 아이히만을 기소한다.

 

아이히만을 직접 기소했던 법무부 장관 기드온 하우스너(좌측) & 아이히만 강제 송환을 지시했던 다비드 벤구리온 수상(우측) (출처: 위키피디아)

 

한나 아렌트는 기드온 하우스너의 언행을 비판하며, 그가 아이히만을 필요 이상으로 괴물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영화 <오퍼레이션 피날레> 또한 바로 이런 시선으로 아이히만을 바라본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6p

...하우스너 씨가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유리 부스 안의 인물[=아이히만]은 더욱더 창백해지고 더욱더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가서, "바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괴물이 앉아 있다"고 소리치며 손가락질해도 그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아렌트의 묘사처럼 아이히만은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아이히만 역을 벤 킹슬리와 같은 카리스마 있는 배우를 통해 연출한다.

 

아이히만 역을 연기한 벤 킹슬리 (왼쪽) vs. 실제 재판 현장의 아이히만 (오른쪽) (출처: MXDWN & The Jewish News)

 

연출된 아이히만의 모습도 꽤나 폭력적이다. 재판 증거로 제출된 문서의 "아이히만이 총살을 제안하다(75p)"라는 문장 하나만을 가지고, 마치 아돌프 아이히만이 총살을 지휘한 것처럼 연출하는 장면도 있다.

 

<오퍼레이션 피날레> 아이히만이 총살을 명령하는 연출 (출처: 유튜브 공식 예고편)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그럴 위인이 못 되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비롯한 수많은 난민들을 이송하고 추방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을 뿐,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군사 작전을 펼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이히만은 자신이 단 한 번도 처형 명령을 내린 적이 없으며, 자신 스스로도 누군가를 죽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74p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 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떠한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아이히만이 총살을 제안"한 것은 사실 진부하기 그지없는 맥락에서였다. 아이히만이 일을 미루려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이히만은 세르비아에 주둔 중이던 독일군으로부터 해당 지역의 유대인들을 다른 곳으로 이송하라는 통보를 받았다(75~76p). 아이히만은 꽤나 바빴던 듯하다. '이미 다른 이송 계획이 있어 그 계획은 수행할 수 없다'는 식으로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말이 뒤따랐다: '알아서 하세요.' 

 

유대인들을 세르비아에서 옮겨줄 수는 없으니, 군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이다(76p). 이미 독일군은 유대인들을 포함해 여러 포로들을 총살해오지 않았는가. 독일군이 손에 피를 묻히든 말든 그것은 아이히만이 알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히만 역을 맡았던 여러 배우들. 하나 같이 참 카리스마 있게 생겼다. (출처: Tablet)

 

이렇게 보면 아이히만은 정말 평범한 군무원이었다. 당장 내일 출근하면 옆 부서에 앉아 주구장창 일만 미루며 월급 루팡을 하고 있을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그를 당시 '홀로코스트의 설계자(the Architect of Holocaust)'라고 부르고 있었다. '유대인이라는 골칫덩어리'에 대한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이 모두 아이히만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Architect of the Holocaust sentenced to die

In Tel Aviv, Israel, Adolf Eichmann, the Nazi SS officer who organized Adolf Hitler’s “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 is condemned to death by an Israeli war crimes tribunal. Eichmann was born in Solingen, Germany, in 1906. In November 1932,

www.history.com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 '최종 해결책'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은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라는 곳에서 이루어졌고, 아돌프 아이히만은 여기에 그저 '서기'로 참여했을 뿐, 의사결정권은 훨씬 더 높으신 분들께 있었으니까.

 

반제 회의가 열렸던 건물로, '반제'는 이 건물이 위치한 지역명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반제 회의를 소집하고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좌측) & 하이드리히에게 최종 해결책과 관련된 업무 권한을 부여했던 헤르만 괴링(우측) (출처: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이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모두 뒤집어 씌워 성지의 재판장에서 처형해버릴 수 있는 희생양만 있으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아이히만이었다. <오퍼레이션 피날레>의 예고편에 등장하는 아이히만의 대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오퍼레이션 피날레> 예고편

You have no interest in what I have to say, unless it confirms what you think you already know.
자네는 내 말에 관심도 없겠지, 자네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정의의 집' 속 <아이히만 쇼>

지금까지 <오퍼레이션 피날레>를 통해 알 수 있는 아이히만 재판의 맥락과 당시 여론에 대해 살펴봤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재판은 사실 하나마나 한 기획 재판이었다. 이스라엘에겐 시온주의의 분노를 쏟을 희생양이 필요했고, 아이히만은 그가 무슨 일을 했든 '홀로코스트의 설계자'의 자격으로 처형당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 기획 재판은 극적인 성격을 갖기 쉽다. '쇼'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도 이를 알고 있었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7p

이 재판은 ... 벤구리온이 처음에 염두에 두었던 쇼, 즉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간단히 말해 전 세계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교훈'을 담은 쇼는 이루어졌다.

 

이런 시선을 가장 잘 담은 영화가 바로 <아이히만 쇼>이다. 아이히만 재판은 당시 미국의 방송국을 통해 37개 국에 생중계되었는데, <아이히만 쇼>는 이 방송 영상을 교차 편집으로 활용한 영화이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이 영화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첫 장 '정의의 집'을 통해, 재판에 참석했던 다양한 인물들이 어떤 쇼를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 다루어보겠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 - '정의의 집'에서의 '아이히만 쇼'

한나 아렌트의 문제작, 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보고 있다. 지난 포스트들에서는 원서가 없이는 읽기 힘든 대목들을 살펴본 뒤, 영화 에서 다루고 있는 재판 전 배경들을

mayiread.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