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속 시온주의 & 이스라엘 건국사

mayiread 2023. 5. 19. 20:55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보고 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드디어 땅과 나라를 갖게 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며, 저서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시온주의'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2,500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제2차 세계대전 후에야 이스라엘이 드디어 땅과 나라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럼 그전엔 유대 민족에게 나라가  없었다는 말일까. 있기는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멸망했을 뿐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건 기원전 586년의 이야기다. 고대 이스라엘은 파란만장한 흥망성쇠의 역사 끝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쪼개지는데,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차례로 멸망한다.

느부갓네살 왕을 표현한 목판화(좌측).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대 민족을 묘사한 그림(우측). (출처: 위키피디아)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에 끝나고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언한 것이 1948년이니, 유대 민족은 2,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라도 없이 떠돌며 살았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고향 땅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집단디아스포라(Disspora)라고 부르는데,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2,5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떠돌며 살았기에 말 그대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형국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 인구들 (출처: 위키피디아)

 

 

Jewish Population by Country 2023 - Wisevoter

The Jewish population in the world is estimated to be around 14 million. It is spread throughout many countries, with the highest population concentrations in Israel and the United States. In Israel, the Jewish population makes up 74% of the total popul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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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유대인들의 국가'

그렇다면 유대 민족은 도대체 어떻게 2,500년 만에 다시 나라를 갖게 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른 민족의 영토를 빼앗았다. 바로 팔레스타인이다.

무력 충돌 후 시위 중인 이스라엘 국민들(좌측)과 팔레스타인 국민들(우측) (출처: 연합뉴스)

 

지금의 이스라엘 영토는 모두 팔레스타인의 영토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에는 영토의 절반 이상을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UN총회가 1947년에 이 절반 이상의 땅을 '유대인들의 국가'에게 주기로 결정하면서 이스라엘이 다시 나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영역이 UN이 유대 민족에게 주기로 한 이스라엘 영토이다. (출처: Aljazeera)

 

55%의 팔레스타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유엔결의안 181호)'에 투표 중인 UN (출처: UN)

 

 

유엔결의안 181호 60년…원점 회귀한 이-팔 분쟁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인 1947년 11월29일. 유엔 총회는 당시 영국 위임통치령이었던 팔레스타인 영토를 유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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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건국 70년…갈등과 분쟁의 역사 | 연합뉴스

(예루살렘=연합뉴스) 노재현 특파원 = 이스라엘은 14일(현지시간) 건국 70주년을 자축하는 분위기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복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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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주의'의 열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뜬금없이 남의 나라 땅을 빼앗은 걸까? 바로 '시온주의(Zionism)' 때문이다. '시온(Zion)'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왕, 다윗과 솔로몬의 도시와 성전이 있던 지역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그냥 이스라엘의 오래된 성지라고 생각해두자.

 

오늘날 '시온산'의 사진. '시온'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사용되었기에, 다윗의 도시나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진 곳과는 다르다. (출처: 위키피디아)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시온주의'는 이 성지를 되찾으려는 운동이었다. 유럽에 퍼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 중 일부가 언젠가 이 고국의 성지를 되찾아 다시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을 꾸며 180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의 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팔레스타인 내의 조그만 유대인 정착지로 시작한 것이, 끈질긴 국제 정치적 로비와 무력 투쟁을 통해 지금의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상상해보자. 당신은 유대인이다. 당신의 민족은 2,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기 땅도 없이, 나라도 없이, 유럽 전역을 떠돌며 살아왔다. 그 삶도 결코 녹록지 않았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인 차별과 핍박을 견뎌야 하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서는 홀로코스트의 참상까지 견뎌야 했다. 당신의 민족은 유럽 전역에서 추방당하고, 강제이주당하며, 죽임 당했다. 

 

프랑스에서 복무하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파이 누명을 쓰고 군적을 박탈당하기도 했다(좌측). 유대인의 존재 자체가 유럽의 '문제(question)'라고 생각했던 나치당은 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으로 홀로코스트라는 참상을 일으켰다(우측) (출처: New Yorker & 미국 국가 보관소)  

 

그런 유대 민족에게 시온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아주겠다 한다. 그것도 고대 유대 민족의 성지 위에. 어떤가. 유대인이라면 정말 누구라도 이 시온주의에 열광하지 않았을까. 실제로도 그랬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도 한 때는 시온주의자였으니까. 실로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시온주의와 유대 민족의 빛나는 성공 신화였다.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

그런데 그 빛나는 성공 신화가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유대 민족이 지난 2,500년 동안 배운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을 통해 자기 영토를 넓혀가기 시작했고, 전 세계에 숨어 살고 있는 나치 전범들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데 열심을 다했다. ​그렇다. 시온주의의 열기는 복수와 피의 열병이었다.

 

보르헤스, <알레프>, 독일 레퀴엠 중

수 세기를 지나고 수많은 지역을 거치면서 이름과 방언과 얼굴은 바뀌지만, 영원한 적대자들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국가들의 역사 또한 비밀스러운 연속임을 기록하고 있다... 히틀러는 '하나의' 국가를 위해 싸운다고 믿었지만, 그는 '모든' 국가, 심지어 그가 공격했고 증오했던 나라들을 위해 싸웠다 ... 우리는 유대주의에게 폭력과 칼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다.

 

보르헤스 <알레프>, 인류의 '독일 레퀴엠'

보르헤스의 대표 단편집 중 하나인, 의 수록 작품들을 읽고 정리하고 있다. 최낙원 교수님의 글을 빌어 보르헤스를 무턱대고 읽기 가장 쉬운 방법에 대해, 그리고 보르헤스가 그 깊은 이해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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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건국 후에도 팔레스타인과의 무력 분쟁을 통해 자기 영토를 넓혀 왔다. (출처: Ikadi)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무력 분쟁은 아직도 '가자(Gaza) 지구'를 중심으로 진행 중이다. 가자 지구는 자기 땅에서 밀려난 팔레스타인인들이 몰려 있는 팔레스타인 정착 지구인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테러를 차단하겠다며 2002년부터 거대한 장벽을 세웠다.

 

가자지구를 둘러싼 콘크리트 장벽 (출처: 중앙일보 & 뉴욕 타임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 모두가 여전히 '빼앗긴 자기 땅'을 찾기 위해 싸우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수백 명을 죽이면 이스라엘은 수 천명을 죽인다. 

 

 

 

피비린내 나는 시온주의의 결말을 한나 아렌트의 글에서 감지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마지막을 자신이 아이히만을 위해 직접 쓴 사형 선고문으로 장식한다. 복수심과 분노에 사로 잡힌 아렌트의 판결문에서 가자 지구를 향해 날아가는 이스라엘의 미사일 소리를 예견할 수 있다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악의 평범성'을 다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ichmann in Jerusalem> 에필로그 마지막 문장. 번역은 필자.

... just as you supported and carried out a policy of not wanting to share the earth with the Jewish people and the people of a number of other nations - as though you and your superiors had any right to determine who should and who should not inhabit the world - we find that no one, that is, no member of the human race, can be expected to want to share the earth with you. This is the reason, and the only reason, you must hang.

이 세계에 누가 거주해야 하고 누가 거주해서는 안되는지를 결정할 권리가 마치 당신과 당신의 상급자들에게 있는 양, 당신이 유대 민족 및 수많은 타국가 민족들과 지구를 공유하지 않으려 하는 정책을 지지하고 시행했듯이, 우리는 아무도, 즉 인류의 구성원 중 그 누구도 당신과 지구를 공유하길 원하리라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만 할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 -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

앞으로 여러 개의 포스트를 연재하며 한나 아렌트의 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첫 포스트의 목적은 하나다. 당신이 을 읽지 않게 하는 것.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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