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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 #5 - 보르헤스에게 '문학'이란?

mayiread 2022. 4. 25. 13:04

 

 

 

보르헤스의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과 그의 대표 단편 작품들에서 아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있다. 보르헤스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면 누구나 물어봤을 법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보르헤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는 것이 목표이다.


1. 보르헤스에게 '불멸'이란? - 보르헤스의 말 #2

2. 보르헤스에게 '미로'란?  - 보르헤스의 말 #2

3. 보르헤스에게 '망각'이란? - 보르헤스의 말 #3

4. 보르헤스에게 '사실'과 '허구'란? - 보르헤스의 말 #4 (이전 포스트)

5. 보르헤스에게 '문학'이란? - 보르헤스의 말 #5 (이번 포스트)

 

 

보르헤스의 말 #2 - 보르헤스에게 '불멸'이란?

 

보르헤스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 #2 - 보르헤스에게 '불멸'이란?

마음산책이 번역-출간한 보르헤스의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을 읽어보고 있다. 난해하고 미로 같은 글 뒤에 숨겨진, 동네 이야기꾼 할아버지 같은 보르헤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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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 #3 - 보르헤스에게 '망각'이란?

 

보르헤스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 #3 - 보르헤스에게 '망각'이란?

보르헤스의 진솔한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그의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을 읽고 있다. 난해한 단편들의 저자답지 않게, 유머러스하고 장난끼 가득한 말투로 썰을 푸는 동네 할아버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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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 #4 - 보르헤스에게 '사실'과 '허구'란?

 

보르헤스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 #4 - 보르헤스에게 '사실'과 '허구'란?

보르헤스의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을 읽어보며 아래 질문들을 던져보고 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었다면 누구나 궁금해할 법한 주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인터뷰 속 보르헤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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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미로의 악몽'에 대한 이야기이다. 보르헤스는 삶을 혼란스러운 '미로'와도 같은 것이라 보았고, 영원한 불멸의 삶이란 그 미로 속을 끝없이 헤매야 하는 미로의 악몽과도 같은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비관론만 이야기한 건 아니다. 그는 분명 이야기해준다. 이 '미로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미로의 속임수와 '기다림'

이전 포스트들에서 살펴봤듯 보르헤스에게 삶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와 같이 혼란스럽고 무의미한 일들의 끔찍한 반복으로 채워진 지옥이었고, '죽음'과 '망각'만이 그를 이 미로에서 꺼내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보르헤스의 말 #2 - 보르헤스에게 '불멸'이란?

 

보르헤스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 #2 - 보르헤스에게 '불멸'이란?

마음산책이 번역-출간한 보르헤스의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을 읽어보고 있다. 난해하고 미로 같은 글 뒤에 숨겨진, 동네 이야기꾼 할아버지 같은 보르헤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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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 #3 - 보르헤스에게 '망각'이란?

 

보르헤스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 #3 - 보르헤스에게 '망각'이란?

보르헤스의 진솔한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그의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을 읽고 있다. 난해한 단편들의 저자답지 않게, 유머러스하고 장난끼 가득한 말투로 썰을 푸는 동네 할아버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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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잠깐. 생각해보면 '죽음'도 '망각'도 우리가 굳이 청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찾아온다. 굳이 미로 같은 삶을 벗어나겠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우리는 언젠가 잊고, 죽고, 잊혀진다. 그래서인지 보르헤스는 '망각의 기술'이나 '죽음의 기술'을 가르치려들기보단, 우리에게 '미로의 속임수'에 대해 알려주려 한다.

 

<보르헤스의 말>, 54p

나는 거의 매일 밤 악몽을 꿔요... 빈 방이 많았어요... 나는 이 방 저 방 돌아다녔지요. 방에는 문이 없는 것 같았어요. 나는 계속 마당으로 나가는 길을 찾고 있었죠. 한동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 후에 난 소리를 질렀어요. 하지만 아무도 없었죠...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이건 미로의 꿈일 거야. 그러니까 난 어떤 문도 찾을 수 없을 거야. 이 많은 방 중에서 어느 한 방에 앉아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 할 거야. 언젠가는 깨어나겠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어요. 내가 이건 미로의 악몽이라는 걸 깨닫고 속으로 중얼거렸을 때, 나는 미로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냥 바닥에 앉아 있기만 했지요.

 

<보르헤스의 말>, 104p

보르헤스는 내가 몹시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나타낸답니다. 그는 언론 앞에 나서야 하고 사진을 찍어야 하고 인터뷰에 응해야 하고 정치적인 의견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해야 해요... 그는 또한 실패와 성공을 나타내는데, 그 둘은 허깨비이자 사기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도 있고 재앙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두 가지 허깨비를 똑같이 취급해야 해요.

 


보르헤스는 삶의 돌파구와 출구를 찾으며 일희일비하는 우리에게, 사실 삶은 계속 반복되는 미로라는 것, 뭔가 새로운 출구가 있을 것처럼 계속 우리를 속이는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허깨비 같은 미로를 벗어나는 길은 악몽에서 깨어나길 차분히 기다리는 일이라고, 인터뷰를 통해 우리에게 말해준다.


위의 두 번째 인용문은 보르헤스가 리디어드 키플링의 <If 만일 ―>이라는 시를 인용한 것이다. 시의 전문 링크와 함께, 보르헤스가 인용한 부분만을 발췌해본다.

 

If— by Rudyard Kipling | Poetry Foundation

If you can keep your head when all about you

www.poetryfoundation.org

If you can meet with Triumph and Disaster
And treat those two impostors just the same; 
... you’ll be a Man, my son!

만약 네가 승리와 좌절을 맞이하여 
두 가지 허깨비를 똑같이 다룰 수 있다면
… 너는 어른이 될 것이다, 아들아.



보르헤스에게 '문학'이란?

하지만 보르헤스의 해답인 '기다림'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재수없으면 100년 넘게도 주어지는) 한평생을 기다리는 일은 아주 따분한 일이라는 것.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던 보르헤스는 따분하지 않게 잘 기다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준다. 그 방법이란 '문학'을 하는 것.

 

<보르헤스의 말>, 152~123p

나는 인생이, 세계가 악몽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탈출할 수 없고 그저 꿈만 꾸는 거죠.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어요. 구원은 우리에게서 차단되어 있지요. 그럼에도 나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


내 운명은 모든 것이, 모든 경험이 아름다움을 빚어낼 목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실패했고, 실패할 것을 알지만, 그것이 내 삶을 정당화할 유일한 행위니까요. 끊임없이 경험하고 행복하고 슬퍼하고 당황하고 어리둥절하는 수밖에요. 나는 늘 이런저런 일들에 어리둥절해하고, 그러고 나서는 그 경험으로부터 시를 지으려고 노력한답니다. 많은 경험 가운데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보르헤스의 말>, 38~39p

우리가 단순히 뭔가를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느끼지 않고 뭔가를 발견하지 않아요. 그 순간 우리는 죽은 것이에요... 나는 죽어 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답니다. 나는 호기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늘 경험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 경험들이 시로, 단편소설로, 우화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자신의 '문학하기'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심지어 '잘' 읽거나 '잘' 써야 한다고도 하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읽기와 쓰기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의 문학을 '어리둥절해하는 경험'을 담아낸 시라고 겸손하게 표현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문학적 사명감에 불타올라 흥분하는 반스톤을 노신사 특유의 침착함으로 달래는 보르헤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의 이런 '힘 빠진' 문학론이 어떤 것인지 더 잘 알 수 있다.

 

마음산책, <보르헤스의 말>, 61~63p

반스톤
우리 안에는 언제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와 세상에 이르는 강력한 힘이 있어요. 그것은 모든 면에서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성적으로, 글쓰기로, 말하기로, 만지는 것으로...

보르헤스
살아가는 것으로.

반스톤
살아가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일 뿐이지만, 우리 안에 많은 것을 불어넣음으로써 우리의 고독한 삶을 깨뜨리려는 대단히 강한 충동이 존재해요...

보르헤스
내가 당신 말을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늘 우리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하며 또한 그래야 한다는 말이로군요.

반스톤
우린 우리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아가고 손을 뻗기 위해우리 자신을 더 크게 확장하려고 애를 쓰지요.

보르헤스
그런 것 같군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 언짢은 기분을 느끼지도 말고요. 당신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또는 아주 잘할 수 없고 그저 불완전하게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반스톤
우린 그렇게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게 삶의 기술인 것이지요. 그건 글쓰기에 도움이 되고, 사랑에 도움이 되고,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모든 일에 도움이 돼요.

보르헤스
우리에겐 70년이 넘는 인생이 주어지고, 우린 어떻게든 그 시간을 채우며 살아가야 하니,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어쨌든 한평생의 시간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이 정말 따분하겠지요.

보르헤스 인터뷰집의 편집자 윌리스 반스톤. 시인이자 비교문학교수이기도 하다. (출처: SFGATE)

 

 

보르헤스는 분명 '모든 언어는 의미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지만, 동시에 문학은 '따분한 한평생의 시간'을 채워나가는 '기다림의 기술'일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미로에서 풀려날 날을 기다리며, 호기심 가득한 장님의 눈으로 세상을 담아내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만들어왔다.

 


인터뷰집의 남은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다양한 언어와 문학 작품에 대한 그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보르헤스는 어느새 그저 말을 사랑할 운명의 눈먼 노인으로만 보인다. 그의 엄청난 명성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집에 수록된 그의 시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거나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은 아니다. 고대 언어의 아름다움에 취해 늘어놓는 그의 이야기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태반이다. 어쩌면 보르헤스에게는 언어를 통해 엄청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마법 같은 문학적 기술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의 말'에 직접 부딪쳐보는 경험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환상적 사실주의 작품들 뒤에 숨어, 미로의 악몽에서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행복하게 책을 읽고 있는 동네 할아버지 보르헤스의 모습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16,800원 정도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보르헤스의 말 - YES24

눈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1980년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여든의 나이로 대담을 위해 뉴욕, 시카고, 보스턴을 여행했다.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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