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두 번의 결혼 - 엘사, 그리고 마리아 코다마

mayiread 2022. 3. 30. 15:4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알레프>, <픽션들>로 대표되는 단편집으로 잘 알려져 있는 대문호이기도 하고, '거짓 사실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작품 세계로 데리다나 푸코 등의 사상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지식인이기도 하다. 도서관 사서와 관장을 지내며 눈이 멀도록 책을 읽어댄 그는 결국 유전적인 이유로 노년에 실명하게 되지만, 시력을 잃은 후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보르헤스 포스팅 목록

보르헤스,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보르헤스 <알레프>, 보르헤스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보르헤스,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보르헤스의 글은 꽤, 때로는 너무, 난해하다. 도서관 사서로 있으며 눈이 멀 정도로 책을 읽어댄 그가 온갖 인유(allusion)로 글을 도배하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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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로에스의 탐색

 

보르헤스 <알레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아베로에스의 탐색'

보르헤스의 대표 단편집, <알레프>의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난해한 보르헤스의 작품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최낙원 교수님의 글을 빌어 저번 포스트에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보르헤스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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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온의 집

 

보르헤스 <알레프>, 가련한 '아스테리온의 집'

보르헤스의 대표 단편집 중 하나인, <알레프>의 수록 작품들을 읽고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 포스팅에선 최낙원 교수님의 글을 빌어, 난해한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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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레퀴엠

 

보르헤스 <알레프>, 인류의 '독일 레퀴엠'

보르헤스의 대표 단편집 중 하나인, <알레프>의 수록 작품들을 읽고 정리하고 있다. 최낙원 교수님의 글을 빌어 보르헤스를 무턱대고 읽기 가장 쉬운 방법에 대해, 그리고 보르헤스가 그 깊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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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보르헤스의 개인사 중에서도 가장 의외라고 느꼈던 것이 그의 결혼사이다. 가짜 주석과 인유(allusion)가 넘쳐나는 그의 난해하고 미로 같은 글들이야 실명한 다독가의 특성이라고 대충 믿고 넘어가도 된다만, 노년에 37살이나 어린 미모의 여인과 재혼한 건 다소 뜻밖이었달까.

 

보르헤스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마리아 코다마 (출처: RAWSTORY, Efemerides)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다보니 아, 역시 보르헤스 하고 이해되는 대목이 많았던지라, 혹시 어렵게 입문한 보르헤스 덕후가 있다면 탈덕하지 않길 비는 마음으로 짧게 포스팅해본다.

 

 

 

68세에 맞이한 첫 아내, 엘사

First things first. 물도 위아래가 있고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니, 두 번째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첫 번째 아내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나...는 꼰대인 척 좀 해봤다. 용서를 빈다. 아니, 반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여튼, 보르헤스의 첫 번째 결혼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당시 보르헤스의 나이에 있다. 첫 번째 아내 엘사를 맞이할 때 보르헤스는 무려 68세였다. 10살 연하였던 엘사가 그리 젊어보이지 않는 걸 보니, 보르헤스, 정말 늙은 나이에 결혼한 게 확실한 듯하다.

 

첫 번째 아내 엘사. 그녀의 표정이 떨떠름해보인다면 기분탓만은 아니다. (위키미디어)

 

근데 잠깐. 보르헤스는 이미 40대에 대작가가 되었고 눈이 먼 것도 노년의 일이니, 칠순이 다 되어가도록 결혼을 '못'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보르헤스가 추남이었던 것도 아니고, 추종자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보르헤스는 결혼에 딱히 뜻이 없었던 듯한데...

 

나름 꽃미남이었던 보르헤스 (출처: 위키피디아)

 

이상한 생각에 찾아보니, 엘사와의 결혼에는 어머니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68세가 될 때까지도 보르헤스는 독신으로 어머니와 함께 지냈는데, 눈이 먼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권유로 10살 연하의 엘사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한다.

 

군기가 빠짝 든 보르헤스와 그의 어머니 레오노르 (출처: This Recording)
역시나 편치 못한 표정의 보르헤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은 불쌍하기도. (출처: Harvardhum12, Tanmoor)

 

 

하지만 이 결혼 생활은 3년 만에 끝나고 만다. '보살핌을 갈구하는 눈먼 노인' 보르헤스와 '문학보단 명품에 관심이 많은 여인' 엘사는 아무래도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보르헤스가 성적으로 불구였다느니, 엘사가 질투가 많고 의심이 심했다느니 말들은 많지만, 당사자들 이외에는 정확한 사연은 알 길이 없겠다. 보르헤스의 어머니가 실명한 아들의 보모 노릇을 할 며느리를 찾았었던 거라면,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분명한 건, 보르헤스가 엘사와의 결혼을 '해명하기 어려운 미스테리한 실수(a quite inexplainable and mysterious mistake)'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Jorge Luis Borges and his ‘bitch’ | The Spectator

A review of Georgie & Elsa: Jorge Luis Borges and his Wife: The Untold Story, by Norman Thomas di Giovanni. Sour grapes seem to drive this prurient look at an unhappy part of the great Argentine writer’s life

www.spectator.co.uk

엘사와 함께 걷고 있는 보르헤스 (출처: Spectator)

 

 

이혼 후 보르헤스는 다시 어머니의 집으로 이사해 어머니가 99살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지내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87세까지 독신으로 지낸다. 보르헤스는 87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스위스 제네바에 묻혔다.

 

제네바에 있는 보르헤스의 무덤 (출처: Atlas Obscura)

 

 

 

보르헤스의 마지막 아내, 마리아 코다마

응? 아니 잠깐. 이 포스트, 마리아 코다마에 대한 이야기 아니었나? 보르헤스가 87세까지 독신으로 살다 죽어버린 거면, 마리아 코다마하고는 언제 결혼한 건데? 이런 의문이 들었다면 제대로 읽고 있는 게 맞다. 보르헤스는 죽기 두 달 전에 마리아 코다마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

 

유명 작가가 죽기 두 달 전에 37살 연하 미모의 여성과 결혼했다니. 이 말만 놓고 보면, 다 죽어가는 유명 작가 할아버지와 결혼해 유산을 챙기려는 마리아 코다마의 수작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리아 코다마는 보르헤스의 재산을 노리고 어디선가 갑툭튀한 여인이 아니다. 보르헤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더 이상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자, 자신의 보호자겸 비서로 일해줄 사람을 뽑았는데, 그게 바로 마리아 코다마였다. 코다마는 16세에 처음 보르헤스를 만나 함께 문학 공부를 해오던 문학도였고, 보르헤스의 어머니가 숨을 거둔 후부터 무려 11년 동안이나 그의 어머니를 대신해 보르헤스를 돌보다 50세의 나이에 결혼한 것이니, 보르헤스와 34년을 함께 해 온 사이였던 것이다.

 

Such Loneliness in that Gold: María Kodama on Life After Borges | Sydney Review of Books

When I met María Kodama to speak about her life with Borges, her generosity and warmth were at odds with everything I’d ever read or heard about her.

sydneyreviewofbooks.com

보르헤스의 비서이자, 두 번째 아내였던 코다마 (출처: <보르헤스의 말>, BigBang News, RAWSTORY, EL PAIS)

 

 

코다마는 분명 미인이었고 보르헤스에 비하면 젊었지만, 눈먼 간암 말기 환자가 거의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갑자기 여자를 밝히게 됐다는 설명은 다소 억지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다. ​보르헤스 이야기를 다루는 해외 저널들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보르헤스가 자신의 재산과 작품을 전 부인인 엘사에게 유산으로 넘기고 싶지 않아서 굳이 어려운 행정 절차를 거쳐가며 코다마와 공식적인 부부 관계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보르헤스와 코다마.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출처: Alchetron)

 


​보르헤스도 (그의 인터뷰집을 번역 출간한 마음산책만큼이나) 탁월한 선택을 한 것 같다. 마리아 코다마는 보르헤스 사후에 재혼조차 하지 않고 '보르헤스 국제재단(Fundación internacional Jorge Luis Borges)'을 설립해 보르헤스의 작품을 알리고 보르헤스 문학 연구를 지원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Fundación internacional Jorge Luis Borges - Site

Fundación internacional Jorge Luis Borges Fundación dedicada a la divulgación de la vida y obra de Jorge Luis Borges, contribuyendo a su conocimiento y propiciando su correcta interpretación La Fundación Internacional Jorge Luis Borges, creada por Mar

www.fundacionborges.com.ar

 

María Kodama - Wikipedia

In this Spanish name, the first or paternal surname is Kodama and the second or maternal family name is Schweizer. María KodamaMaría Kodama at the Paris Book Fair, March 22, 2014Born (1937-03-10) March 10, 1937 (age 85) María Kodama Schweizer (born Mar

en.wikipedia.org

 

 

 

포스트를 다 쓰고 나니, 보르헤스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너무 편애가 심했나 싶기도 하다. 마리아 코다마는 보르헤스 사후에 여러 출판사 및 번역가들과 갈등을 빚으며 '터무니 없는' 인세 및 계약 관계를 바로 잡았다고 하는데, 그 중 가장 심한 갈등을 빚었던 번역가가 Norman Thomas di Giovanni다. Giovanni는 보르헤스의 첫 결혼 이야기를 책으로 쓴 저자이기도 하다. 

 

Georgie and Elsa: Jorge Luis Borges and His Wife: The Untold Story

Norman Thomas di Giovanni (born 1933) is an American-born editor and translator known for his collaboration with Argentine author Jorge Luis Borges.

books.google.co.jp

 

Giovanni는 그의 책에서 보르헤스를 '성적인 실패작(a sexual failure)'이자,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도 하는(urine gushing down his legs inside his trousers)' 늙은이로 그린다. 아마도 Giovanni의 서술은 대부분 사실일 것이다. 보르헤스의 글과 말, 외양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유약하고 이용해먹기 좋은 남성(a weak and exploitable man looking for love)'의 모습을 상상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행인 건 보르헤스가 아이돌이나 연예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약하고 남성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늙은이가 매혹적이고 깊은 울림을 지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엘사에겐 안된 일이지만) 코다마와 비슷한 마음으로 보르헤스의 곁에 남아 그가 이야기를 들려주길 기다리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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