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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리뷰대회 수상작 - 성장의 마법, 성장의 문법 #3

mayiread 2022. 9. 11. 14:18

 

2022년 7월에 있었던 창비의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리뷰대회 수상작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지난 포스트는 아래를 확인해주세요.


1 50만 부짜리 베스트셀러를 왜 고쳤을까

'청소년', '영어덜트' 문학에서 '문학'으로

멈출 줄 모르는 '악몽의 인과율' (이전 포스트)

'단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이니까(이전 포스트)

5  '부서진' 선택에 대한 이야기 (이번 포스트)

6  성장의 마법, 성장의 문법 (이번 포스트)

 

 

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리뷰대회 수상작 - 성장의 마법, 성장의 문법 #1

2022년 7월, 창비에서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출간을 기념해 리뷰대회를 공모했습니다. 앞으로 연재할 리뷰는 본 공모에서 '체인 월넛 프레첼'이라는 엄청난 이름의 상을 수상한 것인데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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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위저드 베이커리> 리뷰대회 수상작 - 성장의 마법, 성장의 문법 #2

2022년 7월에 진행된 창비의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리뷰대회 수상작 연재 포스트입니다. 지난 포스트는 아래를 확인해주세요. 1 50만 부짜리 베스트셀러를 왜 고쳤을까 (이전 포스트) 2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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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선택에 대한 이야기

구병모는 분명 주인공의 두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그게 무언가. 아마도 그건 '선택'이었던 것 같다.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초판 작가의 말 251p, N의 경우 247p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틀릴 확률이 어쩌면 더 많은, 때로는 어이없는 주사위 놀음에 지배받기도 하는. 그래도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마법이라는 것 또한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을 뿐 꿈속의 망중한이 아니었다.

 

그런데 선택이라니, 도대체 무슨 선택 말인가. 구병모가 작가로서 마법의 제빵사의 손을 통해 주인공에게 허락한 가장 큰 선택은 역시 '타임 리와인더'였다.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209-210p

타임 리와인더. ...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이걸 내게 주었다. ... 그는 허락한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책임을 나누어서 진다고, 시간을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감아도 좋다고.

 

구병모는 독자들에게도 선택지를 들이민다. 그녀는 소설의 끝에서 '시간을 되돌리시겠습니까?'라고 묻는 팝업창을 띄우고 예(Y), 아니오(N) 버튼을 제시하듯, 시간을 되돌리는 선택지(Y의 경우)와 되돌리지 않는 선택지(N의 경우)의 귀결을 모두 보여준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마지막 두 챕터명. 웹사이트 팝업 대화창의 Y/N 버튼명 같다. (직접 촬영 및 제작)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이 '씹다 뱉어 버린 껌 같은 삶'을 집요하게 살아내겠다는 영웅적인 생의 의지를 획득하는 건 'N의 경우'에서이다. 구병모는 자신이 '아무런 조건 없이' 허락했던 그 '타임 리와인더'를 배 선생의 발밑에서 박살 내버린다.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236p & 241p

... 나는 언제인지 모를 시간으로 나를 되돌려 줄 그것을 줍다가, 배 선생과 부딪쳐 그것을 도로 떨어뜨리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배 선생의 발밑에서 파삭 하는 파열음이 나고, ...

지금껏 잘 견뎌 왔다. 앞으로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타임 리와인더를 쓰지 못하게 한 불의의 사고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안다. 누군가가 씹다 뱉어 버린 껌 같은 삶이라도 나는 그걸 견디어 그 속에 얼마 남지 않은 단물까지 집요하게 뽑을 것이다.

 

그러니까 구병모가 '그저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 했을 때 그 '선택'이라 함은 사실 '부서진 선택'이었던 것이다. 불의의 사고 속에서 박살나버린 선택, 기성세대의 분노에 빼앗겨버린 선택, 그래서 애초에 바란 적 없었던 그 삶처럼 던져지고 강요된 선택. 구병모 작가가 고집스럽게 들려주고자 했던 것은 이 빼앗긴 선택 속에서만 가능한 성장의 비밀이었을 것이다.

 

 

 

성장의 마법, 성장의 문법

성장의 비밀이라고 했다. 정말 비밀이다. 책 속에서 구병모는 성장에 대해 말을 아낀다. 초판 작가의 말에 남긴 다음의 말이 어쩌면 그녀가 성장에 대해 한 유일한 말이다.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251p

상처가 나면 난 대로, 돌아갈 곳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이가 틀어지면 틀어진 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삶을, 단지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이 실은 더 많을 터다. 그렇다 보니 귀향이나 회복, 치유와 화해를 넘어 미래에의 전망에 이르는 성장의 문법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했다.

 

정말로 그렇다. 구병모의 이야기에서는 그 누구도 회복되거나 치유되지 않고, 그렇기에 가정으로의 귀향을 통한 화해나 화합 또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희는 여전히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고, 배 선생은 다시 한번 실패한 결혼을 뒤로하고 무희와 함께 떠나간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아버지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도 아니다. 위자료와 소송 비용으로 재산을 다 잃은 아버지는 집행유예 판결 덕에 주인공의 곁에 여전히 들러붙어 있다. 당연히, 떠나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부모다운 부모도, 가정다운 가정도 애초부터 갖지 못했던 주인공은 이제 파스타 전문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오롯이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살아내야 한다.

 

 

하지만 구병모는 단 한 가지에 대해서 만은 이야기한다. 바로 미래에의 전망.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위저드 베이커리를 찾게 된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구병모는 미래를 향해 달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247-248p

위저드 베이커리의 간판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이렇게 달리니 꼭 언젠가 그날 같아서 웃음이 난다. 그러나 그때는 나를 붙드는 현실에서 격렬히 도망치다가 그곳에 다다랐을 뿐이다.


지금은 나의 과거와, 현재와, 어쩌면 올 수도 있는 미래를 향해 달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총합으로서의 주어진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그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주인공은 몽마가 내린 악몽 속에서 모종의 깨달음을 얻고 배 선생과 아버지에게 건네는 말들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157~159p

이제는 돌아가는 일 자체도, 또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지금까지 당신이 나한테 했던 일들은 내 선택에 대한 대가 정도로 생각해 둘게요. 이젠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지요. 여긴 당신들만의 공간으로 삼아도 돼요. 알아서들 행복한 미래 구상도를 그리라고요. ...... 내가 이 그림에서 빠진다고 해서 당신들을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 거예요. ...... 단 이제는 나도 그만 내버려 둬요. 

 

주인공은 자신이 돌아갈 가정이 없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배 선생과의 관계에 소극적이었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이제 그녀와의 관계 또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음을 직시한다. 주인공은 애초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귀향과 회복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그건 곧 자신만의 터를 직접 찾아 다져야 함을, 오롯이 홀로 서야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를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버려 두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어차피 자신의 삶을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건, 이러나저러나 매한가지니까. 내 아버지이길 선택하지 않은 이에게, 내가 어머니로서 이해해보고자 굳이 노력하지 않았던 이에게, 내 삶을 나눠 짊어져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몽마의 습격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이내 점장에게서 '아틀라스의 등'을 보게 된다. 그건 점장이 '올바른 선택'을 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선택이 어떤 선택이든 그 책임의 무게를 알게 하기 때문이었다.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180p

의뢰인이 선택에 따라 원래의 목적을 이루더라도 점장은 이득 볼 게 없다. 오히려 점장과 우리와 이 우주는 누군가의 간절한 선택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타격을 받게 된다. 타임 리와인더의 가격이 그렇게 비싼 이유는, 사람들이 쉽게 심심풀이 땅콩처럼 시간을 되감을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그의 등이, 문득 하늘을 제 몸으로 떠받치고 있다는 아틀라스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천구를 등에 짊어지고 있다는 신화 속 거인, 아틀라스. (출처: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렇기에 구병모 작가에게 제대로 된 성장의 문법이란,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에게 던져진 삶을 오롯이 짊어질 수 있는 아틀라스의 등을 갖게 되는 조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시간을 되돌리는 등의) 선택이 주어질 때 오히려 더 멀어진다.

 

초판 작가의 말 속 긴 주문과 같이 이러쿵저러쿵 요구사항을 늘어놓으며 쇼핑하듯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애초부터 내 터가 아닌 곳으로 귀향하길 꿈꾸게 되고,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관계의 의미를 되찾고 싶어 한다. 우리는 진짜 성장의 문법을 외면하고, 성장의 마법을 욕망하게 된다.

 

<위저드 베이커리> 개정판, 249-251p

ㅡ 요청 사항? 그렇게 많지 않아요. ... 그저 많이 달거나 느끼하지만 않으면 돼요. 아참, 건포도를 포함해서 모든 건과는 좋아하지 않아요 ... 팥앙금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초콜릿은 괜찮아요. 밀크초콜릿 말고요. 카카오의 함유량은 56퍼센트가 가장 좋아요. ...

이런 성분 넣어 줄 수 있나요. 먹고 나면 아픔을 잊게 되는 것. 오래전에 지나가고 충분히 이겨 냈다고 믿고 있음에도, 문득문득 현실로 불쑥 살아오는 것들 모두. ...

최소한 나를 둘러싼 삶의 비루한 조건들이 조금씩은 달라졌으면 해요. ... 당신의 과자에 그런 마법을 걸어 줄 수 있나요. ... 목적어의 자리에 무엇을 놓든 간에 내가 바라는 건, 지금이 아닌 어떤 것이에요. ...

ㅡ 힘들겠어, 당신한테는. ... 도대체가, 지금을 부정하는 인간이 이런 걸로 조금 도움을 얻어 보았자 무얼 어떻게 바꿀 수 있다는 거지? 기억해 둬,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아니야.

 

이제 구병모는 더 많은 이들이 이입할 수 있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모두가 외면해 왔던 성장의 공공연한 비밀을 더 크게 들려주고 있다. 성장은 사실 애초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던 동화와 마법을 빼앗기는 과정이라고. 그렇기에 우리는 부서진 선택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고. <위저드 베이커리>는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이 공공연한 비밀을 이야기해줄 것이다. 빼앗긴 세대를 살아가는 더 많은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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