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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알레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아베로에스의 탐색'

mayiread 2022. 3. 11. 22:53

 

보르헤스의 대표 단편집, <알레프>의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난해한 보르헤스의 작품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최낙원 교수님의 글을 빌어 저번 포스트에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보르헤스 덕후 양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빌며 링크를 남겨본다. 


보르헤스,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보르헤스 <알레프>, 보르헤스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보르헤스,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보르헤스의 글은 꽤, 때로는 너무, 난해하다. 도서관 사서로 있으며 눈이 멀 정도로 책을 읽어댄 그가 온갖 인유(allusion)로 글을 도배하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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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연재 포스팅은 '아베로에스의 탐색'이라는 단편으로 시작하고자 하는데, 보르헤스가 '객관적 사실'을 대하는 작가로서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 또한 <알레프>의 다른 단편들에 대해서는 단편집 끝에 몰아서 후기를 썼지만, '아베로에스의 탐색'만큼은 작품 바로 뒤에 이어 자신의 해설을 덧붙이기도 했다.

 

 

 

아베로에스의 금지된(?) 목표?

작품 뒤의 해설에서 보르헤스는 "좌절과 실패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아베로에스의 이야기를 썼다고 밝히며(128p),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지되어 있지 않지만 자기에게는 금지된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129p) 인물이라고 말한다.

 

'금지되어' 있는 목표라니, 아베로에스가 무슨 금단의 지식이라도 얻으려 했던 걸까.

 

 

아베로에스의 이야기는 사실 금단의 지식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 '금지되다'는 스페인어 'está vedado'를 (아마도 조금은 잘못) 번역한 것인데, 영어 forbid와 같은 뜻을 지닌 스페인어 동사 vedar의 수동형이다.

 

&#39;아베로에스의 탐색&#39; 뒤에 남긴 보르헤스의 해설 원문. 보르헤스는 아베로에스를 &#39;다른 사람들에게는 금지되어 있지 않지만 자기에게는 금지된 어떤 목표를 찾고자 하는 사람&#39;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아베로에스의 탐색' 뒤에 남긴 보르헤스의 해설 원문. 색칠한 부분이 문제의 부분이다. (출처: 로잔대학교(UNIL))

 

forbid와 vedar에는 모두 '금지하다'라는 뜻 외에도 '어렵게 하다, 불가능하게 하다'의 의미가 있으니, 위의 문장을 의역해보자면 아베로에스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하다 실패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리 어렵지도 않았을 일을 이루기 위해 일종의 '헛고생'을 한 인물이랄까.

 

그렇다면 이 '아베로에스'라는 인물, 어떤 인물일까?

 

 

 

가장 바른 주석가의 실패한 탐색

아베로에스(Averroes)는 이븐 루시드(Ibn-Rushd)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아랍의 그리스 문헌 연구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에 대한 가장 바른 주해를 쓰려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보르헤스가 그리는 아베로에스는 '가장 바른' 주해자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작품 속의 아베로에스는 '그리스어나 시리아어를 몰라서' <시학>의 엉터리 번역본을 가지고 주해 작업을 하다가(117p), 여기서 등장하는 '비극'과 '희극'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심에 빠지는데, 이는 그가 '희곡'이나 '연극' 자체를 이슬람 문화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연극'이란 걸 단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었다면, 혹은 그리스어나 시리아어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비극'과 '희극'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보르헤스가 이야기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어떤 목표"란 바로 '비극'과 '희극'을 이해하는 일이었던 것.

 

다행히도 외국에서 '연극'을 보고 온 동료 철학자이자 여행자 아불카심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연극'이 무엇인지 묘사해주는데, 안타깝게도 아베로에스와 그의 친구들은 '연극'이라는 게 무엇인지는커녕, 왜 그런 게 존재해야 하는지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베로에스는 다른 동료 학자들과 아랍어와 아랍 문학을 찬양하는 대화를 한 뒤에, 자신이 신성한 코란과 고전 시의 지혜 속에서 '희극'과 '비극'의 개념을 발견했다고 믿고 이를 엉뚱한 내용의 주해로 옮긴다.

 

보르헤스, <알레프>, 129p

"아리스투(아리스토텔레스)는 찬사를 비극이라고, 풍자와 저주의 말을 희극이라고 이름 붙였다. 『코란』과 이슬람 사원에 있는 『무알라카』에는 훌륭한 비극과 희극들이 가득하다."

 

 

단편의 제사(inscription)로 사용된 르낭의 글에서는 이런 아베로에스의 해설을 '우스꽝스러운 실수'라고 평가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독해와 창작

흥미로운 점은 보르헤스가 이런 아베로에스의 '우스꽝스러운 실수'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

 

<알레프>, 130p

나는 이 작품이 나를 비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연극이 무엇인지 감지하지도 못한 채 희곡이 무엇인지 상상하려고 했던 아베로에스가 르낭과 레인, 그리고 아신 팔라시오스의 짧은 글 몇 개 이외의 다른 자료들 없이 아베로에스를 상상해 보고자 했던 나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보르헤스는 희곡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내지 못한 아베로에스를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베로에스가 이 단편을 쓴 작가로서의 자신을 나타낸다고 말하며, 그에게 공감하고 자신을 그와 동일시하고 있다.

 

<알레프>, 130p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내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것을 쓰고 있는 동안 과거에 나였던 사람의 상징이라고 느꼈고,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이 되어야만 했고, 내가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를 써야만 했으며, 그렇게 무한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내가 아베로에스를 믿는 걸 그만두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보르헤스는 왜 '우스꽝스러운 실수'에 불과한 아베로에스의 탐색을 굳이 자신의 '글쓰기'와 결부 지은 걸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잠시 '아불카심'이라는 인물에게로 돌아가 보자. 아불카심은 '신 칼란'이라는 이국 땅을 여행하며 실제로 연극을 보고 경험한 인물이며, 자신이 본 연극의 개념을 아베로에스를 포함한 동료들에게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알레프>, 123~124p

... 사람들은 북과 비파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있었지만 그 누구의 눈에도 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투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칼은 갈대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이내 다시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상인은 내게 그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공연하고 있는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물론, 앞서 설명했듯, 이런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철학자들은 이런 '공연'이 미친 짓이거나 쓸모없는 짓이라 매도하며, 그런 헛고생 없이도 아름답고 뛰어난 아랍어와 아랍의 시가 모든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음을 칭송할 뿐이다(124~125p). '바르고 고운 우리말'의 위대함만을 입에 침이 마르게 설파하는 꼰대들이 묘하게 떠오르는 대목이다.

 

보르헤스는 이런 '실패'를 예견이라도 하듯, 아불카심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알레프>, 122p

... 그 당시에도 세상은 흉악한 장소였다. 대담한 자들은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 있었을 테지만, 또한 무엇에나 굽실거리는 가진 것 없는 자들 역시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불카심의 기억은 그가 남모르게 행한 비겁함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 게다가 사람들은 그가 보았던 놀라운 것들을 이야기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는데, 놀라움이란 아마도 전달할 수 없는 것일 터였다. 가령 벵골의 달은 예멘의 달과 똑같지 않음에도, 그것을 똑같은 단어로 묘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보르헤스는, 비겁함을 감추기 마련인 '기억'이란 건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실제를 지나치게 추상화하는 '언어' 또한 경험을 객관적-사실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기에 직접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르헤스는 아베로에스의 입을 빌려, 언어나 기억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무한하고 단순하며 전적으로 물질적인 세계 앞에서, 우리 모두는 '늙고 쓸모없으며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123p).

 

어쩌면 보르헤스가 평생을 경험한 독해와 창작은, 믿을 수 없는 언어와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탐색'이었을지도 모른다.

 

 

 

계속할 수밖에 없는, 독해와 창작

하지만 정작 보르헤스는 시력을 잃고도 30년 가까이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언어의 한계에 대한 회의적인 성찰에도 불구하고, '비극이란 빌려 온 예술과 다름없다'는 르낭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무한히 계속되는 우스꽝스러운 오해로서의 독해와 창작을 계속하며, 의미와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언어와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독해는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렇게 언어로 꿈꾸고 유희하는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마음산책, <보르헤스의 말>, 61p

반스톤
우리 안에는 언제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와 세상에 이르는 강력한 힘이 있어요. 그것은 모든 면에서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성적으로, 글쓰기로, 말하기로, 만지는 것으로...


보르헤스
살아가는 것으로.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도 강렬하게 (하지만 꽤 유도리 있게) 살아낸, 삶으로서의 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 아름다움, 즐거움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의 글보다는 그의 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보르헤스는 생전에 많은 인터뷰를 하며 동네 이야기꾼 할아버지 같이 많은 썰을 풀어줬는데, 이런 그의 솔직한 '말'을 통해 직접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책을 마음산책이 번역해 냈다. 보르헤스 인터뷰집인 <보르헤스의 말>이 그것. 관련 포스트도 있으니 위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길 빌어본다.

 

보르헤스의 말 - YES24

눈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1980년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여든의 나이로 대담을 위해 뉴욕, 시카고, 보스턴을 여행했다.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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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 #3 - 보르헤스에게 '망각'이란?

보르헤스의 진솔한 목소리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그의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을 읽고 있다. 난해한 단편들의 저자답지 않게, 유머러스하고 장난끼 가득한 말투로 썰을 푸는 동네 할아버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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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 #4 - 보르헤스에게 '사실'과 '허구'란?

 

보르헤스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 #4 - 보르헤스에게 '사실'과 '허구'란?

보르헤스의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을 읽어보며 아래 질문들을 던져보고 있다.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었다면 누구나 궁금해할 법한 주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인터뷰 속 보르헤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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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 #5 - 보르헤스에게 '문학'이란?

 

보르헤스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 #5 - 보르헤스에게 '문학'이란?

보르헤스의 인터뷰집 <보르헤스의 말>과 그의 대표 단편 작품들에서 아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있다. 보르헤스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면 누구나 물어봤을 법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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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알레프>의 단편 연재 또한 계속된다. 다음에는 아베로에스만큼이나 보르헤스가 불쌍히 여겼던 '우리의 가련한 주인공', '아스테리온'의 이야기를 다뤄보겠다.

 

아스테리온의 집

 

보르헤스 <알레프>, 가련한 '아스테리온의 집'

보르헤스의 대표 단편집 중 하나인, <알레프>의 수록 작품들을 읽고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 포스팅에선 최낙원 교수님의 글을 빌어, 난해한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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