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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밝은 밤> 구미시 전국독후감공모전 수상작 - 우리는 왜 이야기를 남기는가

mayiread 2022. 12. 1. 18:10

2022년 7월 11일부터 9월 5일까지 접수했던 구미시 전국 독후감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우리는 왜 이야기를 남기는가'라는 제목의 리뷰를 남깁니다. 최은영의 <밝은 밤>에 대한 리뷰로 썼습니다.  

 

구미시립도서관 - 전국 독후감 공모

구미시립도서관 - 전국 독후감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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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적은 것보다 더 솔직한 개인적 감상은, 황정아 평론가 님께서 『창작과 비평』 194호(2021년 겨울호)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에 적어주신 아래의 평론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입니다.

『밝은 밤』의 세계에서 가부장제의 명백한 부정성여성연대의 명백한 가치정확히 맞물려 거의 공백을 남기지 않는다. ... 지니차게 선명한 이 구도는 『밝은 밤』에서 어떤 미결정의 영역으로서의 '밤'을 추방한다. 올바름 여부가 확실치 않은 주장과 질문들이 어둠 속에서 맞부딪치며 예측 불가능한 새벽을 맞을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고통받는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서사 자체는 이렇다 할 고통을 겪지 않은 채 치유를 향해 직선의 진로를 밟는다. ... 하나의 대항서사로서 『밝은 밤』이 겨냥한 것은 물론 절대적 진실이 아닐 것이다. ... 하지만 ... 지나치게 들어맞는 구도...가 어떤 절대적 진실의 분위기를 만들고 그런 만큼 진실의 설득력은 도리어 약화된다.

 

창작과비평 194호(2021년 겨울호) 미리보기 [교보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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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의 상업적 성공은 국문학의 소비자들이 "법적으로 무죄인 자가 문학적으로는 유죄일 수 있고, 법적으로 실패한 소송이 문학적으로는 성공한 소송이 되기도 하는 사례(김형중 평론가, 아래 링크)"에 목말라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합니다.

 

천희란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현대문학』 2019년 7월) | 문학과지성사

천희란의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는 아니 에르노의 이런 문장을 제사로 삼아 시작한다. “지난 5개월간 벌어진 세계적인 뉴스들 가운데 하나를 한 페이지 정도로 자세히 써내라고 한다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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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세대, 100년에 걸친 두터운 서사가 법적-심리적 판결봉을 휘두르는 통쾌한 여성영웅물로 소비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성들의 세계를 향한 누적된 분노를 상상하게 합니다. 그 분노는 무섭습니다. 세계가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녹록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만큼 이 세계가 다른 이들에겐 녹록치 않아질 것임을 예감합니다. '분노의 정치학'을 외치는 이들이 김승섭의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속 정치학의 아이러니와 녹두죽 이야기를 기억해주길 조심스럽게 바라봅니다.

 

김승섭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리뷰대회 우수상 - 프로 파트리아 모리

아래 보르헤스(가 인용한 키플링)의 말로 시작하는 글은 문학동네가 주최한 김승섭 교수의 신간 리뷰 대회를 위해 쓴 리뷰입니다. 감사하게도 신형철 평론가님과 정혜윤 PD님께서 우수상으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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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야기를 남기는가


<밝은 밤>오로지 이야기로만 전할 수 있는 유산에 대한 꿈이다.

 

물론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에 이 서사는 너무나도 두텁다. 백 년 넘게 네 개나 되는 세대를 끊임없이 괴롭혀온 생과 사의 엇갈림. 그 혼란스러운 엇갈림 속에서도 기어이 엮여드는 끈질긴 인연. <밝은 밤>의 여성 인물들은 그 인연이 지닌 모종의 신비한 힘을 통해, 깊은 밤의 위험한 운전 길과도 같은 세계를 돌파해낸다. 화자 지연이 겪은 한밤중의 교통사고와, 그 밤을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시도록(235p)’ 빛으로 밝혀주는 죽은 언니 정연의 목소리는, 이런 여성 생존의 서사를 성공적으로 감각화해준다. 이들은 죽음을 뛰어넘어 서로를 부르고, 그 따뜻하고 밝은 부름을 통해 밤의 어둠과 추위를 몰아내, 마침내 서로를 건지고 살게 한다. 이 서사 속에서 여성 주인공들은 구체적인 연대를 통해 끝내 살아내는여성 영웅(Heroine)들이다.

 

이런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연대와 고립의 이분법적 서사 뒤에는 죽은 이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유산이 있다. 유산이라 했다.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누구의 유산인가. 어렵지 않다. 저자는 이들이 남기는 유산에 공을 들여 표식을 새겨두었다. 그 표식은 이렇게 읽힌다. 기억해주오.’

 

124~125p. 강조는 필자

기억해주갔어? 희자 아버지는 몇 번이고 내게 그 말을 했어. 기래요, 희자 아바이, 내 희자 아바이 이야기 다 기억하갔시오. ... 삼천아,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그게 희자 아바이 유언이다.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삼천아. 

 

222p. 강조는 필자

언니는 아마 잘 몰랐겠지만 할마이는 언니 많이 그리워하셨어. 언니가 그만큼 할마이에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말을 하는 거야. 언니가 그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해서.

 

뭘 기억해달란 말인가. 언뜻 듣기에 이들의 이야기는 하소연에 불과하다. 원폭이 떨어진 직후의 히로시마가 얼마나 생지옥이었는지. 영옥의 편지를 기다리던 명숙 할머니가 얼마나 영옥을 그리워했는지. 그렇다면 이 사연들은 모두 죽은 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타지로 떠나 생지옥을 겪어야 했던 새비 아저씨를, 그리고 차마 전하지 못한 애끓는 그리움으로 영옥의 소식을 기다리기만 했던 명숙 할머니를 기억해달라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를 기억해주오유의 유언은 결국 허망해진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반드시 언젠가는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화자 지연의 목소리를 통해 이를 상기시킨다.

 

82p. 강조는 필자

...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뭘 기억해달란 말인가. 언젠가는 반드시 잊혀질 이야기를 왜 굳이 남겨야만 했단 말인가. 그 질문에 답하려면 다시 새비 아저씨와 명숙 할머니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새비 아저씨는 조상의 신앙을 물려받아 목숨 부지하는 것만으로도천주에게 감사해하던, ‘범사에 감사해하는 인물이다(123p). 그랬던 그가 이제 죽음을 앞두고 기억해달라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그는 원폭으로 쑥대밭이 된 히로시마의 정경을 묘사하며 아주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124p

천주님, 그때 뭐하고 계셨어. 어린아이들, 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찢겨 죽어가는 동안 뭐하고 계셨더랬어.

 

역사적·실제적 사건의 책임을 묻는 구체적인 분노는 보편 범사를 향한 그의 추상적인 감사와 대비되며 독자에게 강렬한 소설적 진실을 각인시킨다.

 

123p. 강조는 필자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희자 아바이가 말했어. 조선 사람이고 일본 사람이고 중국 사람이고 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희자 아바이는 내 손을 붙잡고서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어. 

 

이제 새비 아저씨가 유언으로 남긴 기억해달라는 간청의 목적어가 달라진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희생과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삶을 재앙과도 같이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그리고 사람이 만든 이 재앙과도 같은 삶에 은 부재한다는, 그가 겪은 가장 강렬하고도 구체적인 삶의 진실이다.

 

명숙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떤가. 전쟁통에 영옥의 가족을 거둬들이고도 헤어질 때 가라한 마디만을 남긴 그녀의 무뚝뚝한 서사는 참으로 비밀스럽다(205p). 그녀의 무거운 입이 비로소 열리는 건, 그녀가 유품으로 남긴 붉은 양장의 『로빈슨 크루소』 맨 앞 장에서이다(222~223p). 그녀는 죽은 후에야 털어놓는다. ‘더러운 정의 비밀을.

 

223p. 강조는 필자

영옥아, 내레 너를 처음 봤을 적부터 더러운 정이 들 줄 알고 있었다. 저리 가라면서 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도 너는 강아지마냥 내게 오더구나. 세상이 뒤집히구, 나도 죽을 날이나 기다리며 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비웃어도 할말이 없어.

 

명숙은 왜 영옥이 자신을 비웃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것은 묵묵하고 차갑게 죽을 날을 기다리며 전란을 넘겨내던 자신의 모습에 이라는 것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전쟁통에’ ‘뒤집힌세상에서 누가 누구에게 정을 주고 인연을 약속할 수 있었을까(223p). 그렇기에 그녀에게 정이란 참으로 고약하고 더러운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전쟁통을 살아가던 모든 이들의 보편적인 조건 아니었나. 비밀이라 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명숙 할머니가 전해주려 했던 더러운 정의 비밀은 무엇이었나.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아도 강아지마냥 찾아오는 정의 불가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명숙이 경험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은, 아무리 우스꽝스럽다며 무시해도 기어이 찾아오는 운명적인 힘과도 같다. 그것은 차가운 경멸로도 쫓아낼 수 없고, 무거운 침묵으로도 막을 수 없다. 불가항력이다. 그렇다면 명숙 할마이가 남겨준 이야기 또한 자신의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기념비적인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 가득한 전쟁통에서도 기어코 피어나는 정의 더러움에 대한 비밀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죽음을 넘어 남겨준 이야기는 재앙과도 같은 삶을 살아내는 비밀에 대한 것이다. 그 비밀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우리의 삶을 재앙처럼 만드는 건 결국 마주 앉은 서로이지만, 이 재앙 속에는 신도 악마도 없다. 오직 서로뿐이다. 그렇기에 참으로 고약하고 더럽게도기어이 정은 피어나고 인연은 엮여들어 우리는 살아간다. 저자가 허구의 인물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기억해달라고 전하는 이 비밀은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구체적이다. 그리고 그 구체성을 통해 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어떤 감정적·소설적 진실로 가닿는다.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는 건, 그것이 망자의 마지막 소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재앙과도 같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짓을 저지르는 서로를 이해하고, 강아지마냥 찾아오는 정을 끌어안으며, 함께 살아내기 위해서.

 

이야기의 끝에서 화자 지연은 엄마 미선과 화해한다. 그것은 지연이 영옥의 이야기를 통해 미선의 삶을 이해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미선이 지연에게 강요했던 평범한삶을 한 때 자신도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며 던져버렸다는 걸 기억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314, 319p). 하지만 둘의 화해는 무엇보다도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 위에서 이루어진다. 지연은 미선이 죄책감에 애써 외면해왔던 죽은 정연의 사진들을 함께 정리해준다. 미선은 어두워진 해변으로 어김없이 자신을 찾아왔던 삼천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기억들은 마법 같은 이야기를 지어내며 함께 몸을 씻었던 체온을(325p), 그리고 내게 누군가가 있다라는 마음의 속삭임을 떠올려준다(329p). 그렇게 죽은 이들의 이야기는 지연과 미선이 서로를,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은 이들의 삶을 기록할 수는 없는가. 지연은 한 사람이 느꼈던 모든 감각과 감정, 꿈과 악몽, 사랑과 죽음을 모두 담은 기록(레코드, record)을 상상한다(336p). 하지만 지연은 곧 깨닫는다. 기록으로 담아낼 수 없는 삶의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337p). 저자는 지연의 목소리를 통해, 삶의 어떤 부분은 오로지 이야기의 형태로만 전해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어떤 부분이란 아마도 이야기를 듣는 이를 위해 남겨주는 살아냄의 비밀에 대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것은 오로지 말로만 전해질 수 있는 유산이고, <밝은 밤>은 이 유산의 가능성에 대한 저자의 꿈이다.

 

우리는 왜 이야기를 남기는가. 그것은 우리가 이런 이야기 유산의 가능성에 대한 꿈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또 다른 삶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진실을 담고 있길 빌며, 계속 말을 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말해줘야 한다.

 

337p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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